람스 사람들 이야기 (2)
7. 집이 있어서 떠날 수 있고, 되돌아 갈 수도 있다.
2007년 2월 25일 맑다. 2월의 마지막 일요일이다. 이제 봄이 거의 다 온 것 같이 추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추위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두꺼운 옷들은 옷장 깊숙이 들어가도 될 것 같다.
지난 주일은 설이었다. 람스는 모임을 갖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 명절을 자신에게 있어서의 의미를 찾아 보냈다. 사람들은 람스에 들어서며 더욱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인도 여행을 다녀 와 삼 주 동안을 보지 못한 머슴과 기쁨 부부, 그리고 청량음료에게 건네는 인사는 각별하였다.
머슴과 기쁨 부부, 하늘, 자연, 수국, 뱃사공과 물방울 부부, 놀뫼와 청량음료 부부, 바그완, 생기, 하별, 그리고 나그네가 모였다.
음악이 흐르며 머슴 부부가 인도에서 사 온 향이 방 한 가운데 원목 테이블에서 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이국의 향이 방 안에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 음악은 명상을 이끌어내고, 향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며 깊은 고요함을 태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정지 된 듯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사람들은 표정을 지닌다. 달콤한 잠을 잘 때 눈을 감은 얼굴은 고통에 질끈 눈을 감은 얼굴과 다르다. 굳은 볼이 점점 이완되고 금방이라도 눈을 떠 방긋 웃을 것 같은 화사함이 눈감은 얼굴들에 떠오르기 시작할 때 머슴은 공을 세 번 울린다. 여운이 긴 공 소리는 세 번을 울리는 동안 수많은 세월이 한꺼번에 꺼져가는 듯 생각의 멈춤을 불러낸다. 그 침묵을 뚫고 머슴이 일주일의 묵상을 통해 선정한 책의 한 구절을 읽는다.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사람마다 자기 그릇이 있고 몫이 있다. 그 그릇에 그 몫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해야한다. 그리고 자신을 안으로 살펴야 한다. 내가 지금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일이 인간의 삶이다. 지금 나답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 스스로 물으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내 삶을 만들어주는가. 내가 내 삶을 만들어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저마다 자기 그림자를 거느리고 휘적휘적 지평선 위를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엽서를 쓴다. 안부를 묻는다. 아는 사람에게 엽서를 쓰고 아는 사람에게 안부를 묻는다.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엽서를 쓰고 모르는 사람의 안부를 어찌 물을까. 질문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모르는 것은 아무도 물을 수 없다. 별을 아는 사람만이 별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 몰라서 묻는 것인데 아니까 묻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지식의 한계요 축복이다.
다시 바이올린 연주가 람스 홀을 흐른다. 마치 강물이 흐르며 너도 나도 이끌어 담아 데리고 가는 듯한 음악이다. 문득 내면에서도 강물이 흐른다. 그 강물에 잠기어 멀리 산도 보이고 우뚝 솟은 전나무가 모인다. 구름은 부드럽게 하늘을 애무하고 있으며 바람은 그 전나무의 꼭대기를 스치며 높은 하늘 위에서 춤추고 있다. 흐름은 느리나 기필코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다 준다. 여기 이곳으로 데려다 준다. 흐름이 그치지 않고 변화가 우리를 속상하게 하지 않는 곳. 여기 이곳에 우리가 있다.
이어져 대금 연주가 가슴을 깨우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온 몸이 귀가 되어 대금의 소리를 듣고 있다보니 대금 소리에 묻어나는 숨소리가 들린다. 남의 숨이 아니고 내 숨이라고 하기엔 부끄럽다. 서서히 관현악이 배경으로 떠오르면서 쿵 하고 북이 울렸다. 북소리 단발은 생명의 저장고인 단전을 치고 말았다. 거기서 슬픔부터 올라온다. 뒤이어 감정의 녹이 하나 둘 녹아떨어지며 하얀 속살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다시 같은 운율의 대금소리가 반복할 때 생명은 감은 눈에서 쏟아지기 시작하여 어둠을 고요히 비치고 침묵을 어루만진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하염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 고백은 기도이며 곧 사랑이다.
머슴 :
삼 주 만에 봅니다. 인도는 정말 징그럽게 못살더군요. 신발 신은 사람보다 안 신은 사람들이 더 많아요. 오늘 또 계속해서 창세기 3장 14절부터 24절까지 가겠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읽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한 절씩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선언하시다.
3장 14절 : 주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네가 저주를 받아, 사는 동안 평생토록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
15절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16절 :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17절 :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18절 :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19절 :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20절 :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21절 :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쫓겨나다.
22절 :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23절 :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24절 :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한 사람이 돌아가며 한 절씩 읽고나자 머슴이 토라의 번역을 읽어준다. 성경과 토라의 차이점이 몇몇 나타났다.
머슴 :
성경에는 15절에 ‘원수가 되게 한다.’고 하였는데 토라에는 ‘미워하게 한다.’고 되어있네요. 미워한다가 나은 것 같아요. 근데 사람들은 왜 미워할까.......
나그네 :
16절에 성경에는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라고 나오는 데 토라에는 ‘남편을 갈망하려고 해도’라고 나오고요, 19절에서는 성경에 ‘낟알’이라고 나오는 데 토라에는 ‘빵’이라고 하였습니다. 토라에 나오는 것이 원래에 가까운 것이겠지요?
머슴 :
네. 그거 재미있군요.
3장 14절 : 주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자, 14절에 하나님이 뱀에게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뱀이 한 일이 뭐예요? 무슨 일 한 거예요 뱀이?
생기 :
하와한테 선악과를 먹게 했습니다.
바그완 ;
꼬드겨서 과일 먹게 했어요.
물방울 :
하지 말라는 것을 하게 했어요.
뱃사공 ;
사기 쳤어요. 흐흐흐
하하하
머슴 :
누가 하지 말라고 했어요?
여러 명이 :
하나님이요!
자연 :
어? 하나님이 뱀에게 하지 말라고 한 말이 없는 것 같은데요.
나그네 :
그렇지요. 하나님이 뱀에게 하지 말라고 특별히 얘기한 게 없네요. 그러나 뱀은 가만있지 못하고 뭔 일을 저질렀네요.
머슴 :
그래요. 하나님이 뱀한테 하지 말라고 한 게 있나?
여러 명이 :
없어요.
머슴 :
아담은 몰라. 그것도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냥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입력되어있을 뿐예요. 그런데 뱀은 이미 알고 있어요. 앞에서 얘기 했지만 뱀이 이브에게 가서 처음 한 말을 보면 3장 1절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라고 묻거든요. 그리고는 뱀은 하나님이 거짓말한거다. 네가 그걸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어요. 이미 뱀은 알면서 묻는 척하고 접근하고 있지요. 여기서 뱀이 뭔 일을 한거유? 그리고 뱀은 무엇일까?
나그네 :
의심을 품게 만들었네요.
머슴 :
그렇지. 의심을 품게 한 거야 그러면 뱀은 무얼까? 그리고 뱀은 뭘 알고 있었을까?
자연 :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
놀뫼 :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
머슴 :
그래요. 그래서 뱀은 지식과 지혜의 상징예요. 죽어? 죽는다는 것은 뭐유? 뱀은 죽지 않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선악을 알면 죽는다고 하거든. 그래서 3장 마지막에 결론을 보면 사람이 영원히 살까봐 생명나무 열매를 못 먹도록 그 동쪽에 그룹과 불칼을 놓아 접근을 못하게 합니다.
뱀이 저지른 일이 의심을 품게 한 것인데, 그럼 왜 사람은 의심을 품을까?
하늘 :
내 생각과 다를 때
수국 :
자신이 없을 때
머슴 :
그럼 자신이 있으면 의심 안하나? 그 자신은 믿음이야? 뭘 믿는 건데?
자연 :
에고에 대한 믿음입니다.
머슴 :
그래서 그건 생각에 대한 믿음예요. 생각은 생각을 끝없이 낳아요. 의심은 의심을 또 끝없이 낳지요. 그 의심은 또 유혹해. 테스트하게 합니다. 하늘 선생님, 시험은 왜 봐요?
하늘 :
배운 거 잘 기억하고 있나 보는 거죠. 호호호
머슴 :
안다는 게 무얼까? 뱀은 알았는데. 아니까 묻고 의심하지요. 아까 음악명상에서 읽어 준 것을 다시 한번 읽어줄게요. ‘모르는 것은 아무도 물을 수가 없다. 별을 아는 사람만이 별에 대해 질문한다. 몰라서 묻는 것인데 아니까 묻는다. 이것이 인간 지식의 한계요 축복이다.’잘 음미해 보세요. 맞지요?
그동안의 이 3장의 해석은 실낙원, 즉 쫓겨났다는 것이고, 이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그럼 뭐가 원죄야? 그동안의 기독교의 해석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거지요. 그 얘기는, 더 깊이 해석해보면, 선악과를 따서 죄인이 됐다는 얘기는 선악을 구분하게 되었다는 얘기이고, 선악을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죄인이라는 얘기예요. 그럼 하나님은 선악을 구분하시나, 안 하시나?....... 이것도 생각일까?
놀뫼 :
선악을 구분 하시죠.
머슴 :
나는 안할 것 같은데? 전혀 그 양반한테는 선악 구분이 없을 것 같은데.
놀뫼 :
선악을 알고도 똑같이 대접하는 거죠.
머슴 :
아니, 선악의 기준이 없으니까, 똑같이 대하는 거지요. 허허허.......
이 3장을 적고 있는 자는 과연 어떤 사고로 이것을 썼겠느냐는 건데요. ‘이것이 원죄다.’ 라고 원죄론을 교리화 한 것은 어거스틴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도 원죄라는 사상이 있었을 거 아녜요? 물론 꼭 원죄만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녜요. 에덴 탈출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리는 바에 따라 다른 거지요.
의심은 왜 해요? 결국은 내 생각과 다를 때 의심하지요. 생각을 이은 또 다른 생각입니다.
오늘, 네 개로 얘기 할 거예요. 첫 번째, 뱀은 지식입니다. 두 번째, 여자는 감정이면서 여성성이지요. 세 번째, 남자는 액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생명나무로 가는 방법, 길입니다.
3장은 이런 지식, 감정, 액션 세 개가 분리되어 엉키는 상대세계를 사는 당시 사람들의 해석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상대세계에 사는 모습을 절대의 세계로 못 간다는 면, 추방됐다는 면을 강조해서 상대세계에 매몰되어서 절대세계와 떨어지는 식의 이야기로 쓴 것이지요.
3장 14절 : ....... 사는 동안 평생토록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
뱀이 지식, 지혜인데, 그것만 갖고서는 상대의 세계를 벗어나 절대의 세계로 갈 수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원이 뱀, 의심하는 생각, 즉 지식에게 말을 하지요. 이 14절 후반부에서 하나님이 뱀을 향해서 ‘배로 기어 다니고, 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건 무슨 말일까?
하늘 :
아무리 머리를 써봐야 상대세계에밖에 있을 수 없다!
머슴 :
그렇지! 상대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지요. 대굴빡 써봐야 상대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박박 기어봐야 거기가 거기다 이거죠. 역으로, 절대나 초월의 세계를 맛보려면 생각이 끝나야 가능하고요. 하비람 영성 수련에서 ‘생각이 끝나는 자리가 하늘이 시작되는 자리다.’ 이렇게 말하는데, 거기서 하늘이 절대지요. 그리고 더 멋있는 것이, ‘생각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유라는 겁니다.
15절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
여러분, 미워하는 사람 있지요? 특별히 미워하는 사람이요. 나는 있는데. 지금 없다는 사람도 지금은 없지만 있었지요? 이 15절 앞부분에서 ‘원수가 되게 하겠다.’ ‘미워하게 하겠다.’라고 했는데, 왜 미워할까?
물방울 :
내 마음대로 안 되어서.
머슴 :
마음이 안된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연 :
서로 안 통해요.
머슴 :
그렇지요. 그래요. 서로 안 통해요. 그럼 미워요. 그런데 미움이란 감정이지요? 여기서 여자하고 뱀하고 미워한데요,
물방울 :
관심이 있어야 미워하지 않나요. 관심과 미움은 같은 에너지가 아닌지.
머슴 :
그런가? 그것도 맞네.
놀뫼 :
관심이 있는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은 있는데 그것을 상대방으로부터 얻지 못하면 원망을 하게 되고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일어납니다.
자연 :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하거나 받고 싶은 대로 받지 못하게 될 때. 그것이 생각이 됐든 뭐가 되었든 동등한 입장이면 관심과 기대가 원망과 미움이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 예를 들면 일방적으로 당할 때에도 원망과 미움이 생기지요.
머슴 :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 안으로 초점을 맞춰볼까요? 뱀은 지식이고 여자는 감정이니까, 머리는 하는데 가슴은 안 할 때가 있지요? 가슴은 하고 싶은데 머리가 반대하는 경우가 있지요? 서로 안 통하는 겁니다. 통합되어야 하는데 말이야.
15절 : .......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 15절 후반부에 ‘여자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고 하였죠. 감정은 생각의 머리를 붙들고 생각은 감정의 발꿈치를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더 나아가서 서로 상하게 합니다. 이렇게 감정과 생각은 서로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왜요? 그것은 생각과 감정이 분별이 되어 분리되는 상대의 세계에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분별지가 들어오면 분리되어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요. 하나님이 찾아요. 선악과 먹은 사람을 찾아요. 3장 9절 “네가 어디에 있느냐?” 분별지가 들어오면 이 물음에 답을 못해요. 내가 누군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상실하고 생각이 나인 줄 알고 삽니다. 분별지가 들어와서 절대인 나-self를 잃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가 됩니다. ‘선악과 따먹고 선악 구별하는 게 죄다.’가 아니란 말입니다.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도 아니고 타력에 의해 구원받지 못하면 스스로는 구제 불능인 죄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원죄가 모든 인간의 고뇌의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회복하면 되는 겁니다. 회복하면 돼요! 한자의 罪(죄)는 罒(그물 망)과 非(잘못)의 합성어인데 잘못을 가둔다는 뜻이지요. 즉 죄란 작동 못하게 가둔 잘못, 그리고 잘못을 다루어 작동 못하게 하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분별지를 극복하여 절대인 나-self를 회복하기도 하고 분별지가 작동하면 절대인 나-self를 잃는 원리를 알아 분별지로 인한 잘못에서 해방되는 자유가 우리의 천부의 권리입니다. 이 우리의 원래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공부와 수련을 하는 겁니다. 그동안의 전통기독교에서는 ‘인간은 이 세상에 잘못해서 왔고 처음부터 잘못된 존재다’라고 아예 매도를 해버립니다. 우리의 소중한 천부의 권리인 이 분별지로 인한 잘못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매몰하여 박탈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걸 보세요. 22절에서 ‘우리 가운데 하나(one of us)처럼’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영어를 지나치게 직역한 거고 ‘우리처럼’이 자연스런 번역이겠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우리라고 지칭하고 있는데요, 창세기에 몇 번 나오지요. 첫 번째는 이것이 기록될 당시에 아직 유일신 사상이 정립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저의 적극적인 해석으로, 지금 이 시점에서의 해석은, 우리가 누구나 다 신이라는 겁니다. 왜?
하늘 :
내안에 신이 있으니까.
머슴 :
그럼, 그렇지요. 왜냐하면 누구나 다 근원에서 왔으니까요. 그래서 근원만 회복하면 깨어나는 겁니다. 엊그제부터 내 안에서 맴도는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 인데, 잠자다가 깨어나면 늘 아침이더라구요. 이 말 와 닿습니까? 뭔가 전해지나요?
예수쟁이들은 늘 깨어있으라고 말합니다. 늘 깨어있으라니까 일주일 내내 교회에 가있어요. 목사나 전도사가 아닌 평신도가 말예요. 그건 아니지요. 잠자는 거지요. 대단한 착각입니다.
오늘 얘기는 지난 얘기와 연결시켜 보면, 근원을 잊어먹는 상대의 세계로 떨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더 유추해서 이야기하면 회복의 여지가 있는 겁니다. 깨어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누군지 아는 것이요. 그래서 전에 이야기 했지요. 3장의 가장 대칭적인 신약 누가 15장 탕자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예수의 얘기는 상대의 세계에 떨어져 봐야 근원을 알 수 있다. 즉 돌아갈 수 있다는 거지요. 이건 축복이에요. 저주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부정적이고 저주로 해석했어요. 이 표준새번역의 제목 자체를 보십시오. ‘사람의 불순종’ ‘하나님이 심판을 선언하시다.’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가? 바그완, 하나님은 바그완을 심판하시지?
바그완 :
아뇨. 흐흐흐.
머슴 :
우리 얘기로 돌아와서, 그건 아니지요. 이건 구약의 해석이며 유대인의 해석예요. 근데 유대인 하나가 ‘짠’하고 나타나는데 그는 말합니다. 아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의 이름이 예수래요. BC 4년경에 왔데요. BC 4년이 정확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16절 :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
16절 앞부분에서 여자에게 ‘임신의 고통을 크게 더 한다.’고 했습니다. 고통은 뭐죠? 생각입니까?....... 고통은 느낌입니다. 임신과 출산은 아프지만 낳으면 어때요?
물방울 :
안 낳아봐서 모르겠는데요. 호호호
머슴 :
아니 아들을 둘씩이나 두고 안 낳았다니요?
물방울 :
꺼냈어요. 호호호
머슴 :
아아, 제왕절개 했어요?
하하하.......
머슴 :
왜 고통이 올까요? 고통을 주었다고 되어있는데요. 임신은 생명을 잉태하고 이어가는 것이 임신인데 왜 그것을 고통스럽게 했을까요?
자연 :
분리
머슴 :
그렇죠. 애기한테도 고통이고 산모한테도 고통이지요. 그것은 분리 때문입니다. 생명이 이어지려면 분리되어야 하고 분리가 되어야 생명은 이어집니다. 부처가 기막히게 본 게, 세상은 고(苦)라고 했을 때 ‘상대세계는 고(苦)’라고 말한 겁니다. 사성제(四聖諦)에서 고(苦)뿐만 아니라 집(集), 멸(滅), 도(道)로, 모으고 없애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이 써클, 진행해 가는 과정도 생명작용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분리가 근본이 되어 일어나는 모든 고통을 그 주제로 하여 그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고통이 저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잉태하고 있지만 분리가 되어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으니 분리는 축복이 되어야 하지요.
물방울 :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짐승은 왜 새끼를 낳고 고통을 느끼나요?
머슴 :
인간이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개는 포유류니까 비슷한 걸 느끼겠지만 고통이라는 관념은 없지요. 나아가서 나무나 식물도 열매를 맺어 분리가 되고 있지요. 그러나 똑 같은 분리가 있지만 체질적으로 포유류의 고통 반응을 볼 수가 없지요. 그런데 고통이라는 관념이 없는 개의 출산 시에 신체의 전체를 쏟아 부은 격한 움직임을 춤이라고 한다면, ‘출산의 춤!’이라고 한다면 그게 틀리다고 누가 말할 수 있나요?
물방울 :
그렇게도 하네요.
나그네 :
짐승들이 일상적이지 않은 신체적인 충격을 겪을 때 사람들과 같은 고통이라는 인식과 그에 따른 심적 상처가 없습니다. 심적 상처, 트라우마는 에고가 있을 때 받는 것이고 짐승은 에고가 없다고 하니까요.
머슴 :
그렇지요. 물방울님이 염두에 둔 고통이라는 것은 고통이라는 감각으로부터 후에 발생하는 인간의 인식의 차원과 생각의 차원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순전히 사람의 생각이지요. 개나 짐승이나 나무의 현실이 아니지요. 산림마을에 들어갔을 때 산림장(山林場)에서 왜 나무와 바위에게 물어보나요?
수국 :
생각이 없으니까
머슴 :
그래요. 나무에게 “아프세요?”하고 묻는다면 나무는 “우리세계에는 아픈 거, 슬픈 거, 기쁜 거 없습니다. 다 그거는 당신들의 생각과 느낌입니다.”라고 대답해 줍니다.
여자는 축복받은 겁니다. 남자는 이거 경험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남자가 하와라고 이름을 붙여주는데 하와의 뜻은 생명입니다. 여자의 임신은 축복예요. 노자의 도덕경을 봐도 음(陰), 여성성을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남성성인 양(陽)은 생명이라고 안 그래요.
16절 :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한 것은 당시 시대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000년간의 사회에서의 삶의 형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에 기억해야 할 것은 여자에게도 여성성과 함께 남성성이 있고, 남자에게는 남성성 뿐 아니라 여성성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며 나아가 신성이 있다는 진실이지요. 남성성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는 성향을 갖고 있고 여성성은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것을 가지고 있다. 여성성, 남성성의 해석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나이 먹어봐요. 점점 남자에게는 억눌렸던 여성성이 나오고 여성은 억눌렸던 남성성이 나옵니다. 50대에 접어드는 부부를 봐요. 여자는 강해지고 남자는 부드러워집니다. 신체든. 마음이든.......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데, 진짜 세상은 고(苦)야? ....... 세상이 고(苦)라고 하는 것은 이런 얘기입니다. 상대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에게만 그렇다는 거지요. 그러나 근원을 회복하면 아니라는 얘기지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으면 고(苦)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지. 3장은 그걸 상실한 것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녜요. 그걸 잊어먹은 아담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지요. 아담이 왜 잊어먹어? 하와가 왜 잊어먹어?
자연 :
분별지.
머슴 :
그렇지. 분별지.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상대세계에 살려면 분별지는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17절 :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18절 :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17절에서 18절까지 남자 즉 남성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남성성은 액션(action)입니다. 상징적 신체의 부위는 배지요. 여자, 감성은 가슴, 뱀, 지식은 머리입니다. 남성성은 액션이니까. 분별지를 가졌기 때문에 수고해야 한다. 땀을 흘려야 상대의 세계에서 살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근데 땀을 흘리지 않으면 재미없잖아? 자기가 자기 일에 도취되어서 자기에 몰입해서 살면 나를 느끼고 기뻐합니다.
19절 :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분별지가 있기 때문에 죽는다는 거지. 상대의 세계에서 죽는다는 거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고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율인 게, 죽지 않으면 근원으로 못갑니다. 그래서 인도 여행 중에 떠오른 것이 우리에게 집이 있더라는 겁니다. 집이 있어서 떠날 수 있고 되돌아갈 수 있다는 걸 깨우쳤습니다. 집이 있더라고요. 여행이 별걸 다 가르쳐 좁니다. 하필 인도여행에서요. 재밌어요. 인도가 매력적예요.
지식과 여성성인 감성 그리고 남성성인 행동, 그다음에 연결되는 것이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생명에 대해서 분석해 봅시다. 순 우리말은 삶입니다. 다른 말이 있나요?
생기 :
숨, 목숨
머슴 :
네, 한자 生命을 보면 生은 태어남이고 命에는 숨, 목숨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생기 :
숨하고 성장도 생각납니다.
물방울 :
과정, 변화.
자연 :
생명이 변화라면 생명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놀뫼 :
죽음의 반대.
머슴 ;
그럼 죽음이 뭐야?
물방울 :
사라지는 것
머슴 :
사라진다는 말이 진실한 건가요? 인간의식의 한계가 자기가 안보이면 사라졌다. 없다. 죽었다하고 자기와 말이 안 되면 죽었다고 해요. 죽는 게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죽음이란 말을 한 적이 있나?
나그네 ;
죽음이란 말은 없는데.......
자연 :
흙으로 돌아간다고 되어있는데요.
머슴 :
흙이라고 하면 느낌이 어때? 식물은 흙이 없으면 생존을 못해요. 우리 몸의 대부분이 물인데 지구에 물이 가득해요. 그걸 찾아가는 방법, 기원에 대한 질문을 찾아가는 대표적인 네 가지 방법은 첫 번째 과학, 두 번째 철학, 세 번째 종교, 네 번째 예술입니다. 이 네 개가 합쳐져야 하는데 서로 무시해 왔지요. 그러나 만나야 됩니다.
삶은 뭘까. 여기 죽는다는 얘기는 없어요. 인간만 죽는다고 말을 하는데, 분리되니까 죽는다고 하는데, 분리가 되어야 이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거지요. 죽음은 없어요. 흙으로 돌아간다. 몸이 근본으로 돌아간다고 보아야지요. 생각나는 부처의 이야기가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리고 생사일여 입니다.
우리말 삶을 풀어봅시다.
삶 = 삼 +암 = (ㅅ +ㅏ +ㅁ) +(ㅇ +ㅏ +ㅁ)
= 살 +암 = (ㅅ +ㅏ +ㄹ) +(ㅇ +ㅏ +ㅁ) 이니까
ㅅ:생명, 숨이 +ㅏ:열려서 +ㅁ:완전함으로 간다. ㅇ:하나가 + ㅏ:열려서 + ㅁ:완전해진다.
하나가 열리면 무한해 집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에 의혹을 품은 에디슨이 무수한 것을 발명한 것이 재밌습니다.
타고르의 시입니다. ‘삶이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끝없는 놀라움일 뿐’....... 근데 여러분 존재 안 한 적이 있어요? 근데 죽으면 존재 안 한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존재 안 한다면 여기 어떻게 나타났나요?
20절 :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여성성에 이름을 하와 즉 생명이라고 붙었습니다. 그런데 여성성은 생명을 잉태하는데 남성성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여성성과 남성성은 상호보완적입니다. 이름을 붙여주고 받는 다정하고 친밀함이 있어야 생명이 가능하지요.
21절 :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21절에서 가죽옷을 해 입힙니다. 왜 가죽옷을 해 입힐까요? 이건 뭘 얘기 할까? 진짜 이게 죄고 우리가 진짜 죄인이라면 내버려 두지 왜 그랬데요? 왜 옷을 입혀? 그러니 저주가 아니라는 얘기지. 저주도 맞지 않고 불순종도 맞지 않고 심판도 맞는 해석이 아닙니다. 사랑? 사랑보다 더 적합한 상징이 있어요. 옷을 입혔다! 옷이 상징하는 것은 역할이며 정체성(identity)입니다. 선생님, 딸, 유능한 은행원....... 생기님, 자기 것 해봐요.
생기 :
딸, 교사.......
머슴 :
그리고 대한민국 사람! 다 옷예요. 이것들 없이는 상대의 세계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지금 상대의 세계에 오는 얘기예요. 그러니 절대로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예수가 오셔서 이렇게 해석할 수 있었어요. 예수 오기 전에는 이렇게 해석 못했을 거예요. 하긴 오고 나서도 한참을 이렇게 해석 못했지요. 그러니까 기독교가 여태 원죄론이니 죄인이니 하고 있지요. ‘지구는 죄인들의 소굴입니다. 그래서 지구는 감옥입니다.......’ 이 해석 어때요?
나그네 :
징그럽군요.
하하하.......
머슴 :
그동안 그렇게 해석했다니까요. 말이 돼요? 말이 안 돼지! 타고르가 참 멋있죠? 이렇게 간단하게 써 놓고는 시 제목을 <놀라움>!....... 오늘 아침에 발견하고는 쾌재를 불렀어요. 우리 오늘 얘기와 너무 잘 맞지 않아요? 다시 읽을게요. ‘삶이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끝없는 놀라움’ 그리고 줄 바꿔서 ’일 뿐’ 이야.
야아.......!!!
22절 :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23절 :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24절 :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마지막 절이 참 안 풀립니다. 마지막 24절에서 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에 못 가게 그룹과 불칼을 두었을까요? 요기만 풀면 딱 결론이 맺어지는데 말이야. 다음에 나오는 4장은 완전히 다른 얘기예요. ‘화가 날 일입니까’를 묻는 거지요. 카인이 아벨을 왜 죽여요? 다음주에 물어볼 것이지만요.
바그완 :
화가 나서요.
머슴 :
왜 화가 납니까? 뭐가 화가 날 일입니까?
자연 :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받지 않아서요. 물론 카인의 생각일 뿐이지만 말이죠.
머슴 :
그래요. 자 다음 주를 기대하시고, 마지막 24절을 봅시다. 왜 그룹들과 불칼을 두어서 못 가게 했을까? 그럼 인간은 생명나무에 갈 수 없나?
수국 :
갈 수 있어요.
머슴 :
그럼 뭘로 지키게 했지요? 그룹과 불칼예요. 왜 그룹과 불칼을 둔 것이지요? 그룹은 주석에 보면 ‘살아있는 피조물, 날개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됨’ 이라고 되어있네요. 왜 동쪽에다가 그것들을 두었을까? 그런데 모세는 출애굽에서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고 그 불칼 앞에, 떨기나무 불 앞에 섰네? 그리고 음성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 얘기가 연상이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특히 서구세계에서 상대란 절대를 상실한 것으로 보아 잘못된 것으로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그런 교리로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상대세계에서는 죄의식, 선, 악의 의식을 갖고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가지고 생명에 이를 수 없지요. 또 상대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가 아닙니다. 영생의 세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메타포를 여기서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런 상대세계에서 절대세계로 넘어가는 길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절대예요. 선악과는 상대예요. 자 그런데 상대의 세계에서 절대의 세계로 넘어가려는데 동쪽에 장벽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이게 결론입니다. 이게 무언지 알면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게 여기 표현에 그룹, 불칼, 그리고 동쪽 이래요. 이게 무슨 얘길까?
그리고 재미있는 게, 22절에서 하나님이 ‘쟤들이 우리처럼 되면 어떻게 하나?’ 라고 했어요. 이런 얘기가 여기 들어가 있네요. 하나님이 말하기를 쟤들이 우리처럼 선과 악을 구별한다고 하며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게 아이러니하게 신성이라는 걸 나타냅니다. 여기서 신성의 선악은 인간의 생각 속의 상대적인 선악이 아니라 진정한 선악, 절대 속의 선악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진짜 선을 느낄 때가 언제예요?
나그네 :
통합될 때요.
물방울 :
지금 여기 있을 때
머슴 :
네, 좋군요. 크리슈나무르티는 ‘무엇이 되거나 피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노력하지 않고 몰입될 때 선은 가능하다.‘라고 했어요. 내가 어떤 일에 심취해서 일이 난 지 내가 일인지 모르는 경지까지 갑니다. 다들 가봤죠? 그때 나-ego를 잊게 됩니다. 그때 경험하는 것이 선예요. 선(善)은 착할 선. 착은 뭐야? 달라붙는 거야. 뭐에 착 달라붙었다는 거야? 크리슈나무르티식으로 얘기하면 진정한 나-self에 착 달라붙는 거예요. 예수쟁이 용어로 하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거야. 유니온(union)이야. 유니온(union)! 하나님과 내가 착 달라붙어 하나가 되는 거! 이건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거야. 이건 예수쟁이 아니래도 되는 거야. 근데 그동안 예수쟁이들은 자기네들만 되는 거로 생각했지. 그러니깐 하나님을 독점하겠다고 한 거거든. 기독교 있기 전엔 하나님 없었지? 놀뫼님, 기독교가 있기 전에는 하나님이 없었나요?
놀뫼 :
있었습니다.
후후후.......
머슴 :
예수쟁이 얘기는 나중에 책 소개 할 때로 미루고 결론을 향해 갑시다. 상대세계에서 절대세계로 넘어갈 때 극복해야 한다는 그룹, 불칼, 동쪽이 뭐냐? 난 이렇게 생각해요. 동쪽은 아침을 맞는 것. 늘 깨어나면 아침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세계로 가는 방법은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불칼은 불사르고 자르고 죽고 합니다. 이건 내가 메타포를 그렇게 해석한 겁니다. 깨어있으며, 에고를 불사르고, 자르고, 죽고 해야 상대세계와 절대세계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얘기는 이렇게 상대와 절대의 세계를 얘기한 거고 또 생명과 죽음을 하나로 보고 한 얘기가 아니겠느냐 하고 결론을 내는 겁니다. ‘너 어디에 있느냐’하는 얘기로부터 이렇게 3장의 결론을 유추해 보는 겁니다. 오늘 여기까지 합니다. 질문 있으면 하시죠.
나그네 :
그룹이라는 것이 어떤 어원인가요?
머슴 :
네, 유대교에서 쓰는 상징물예요. 묵시록 같은 데서 많이 나와요. 주석에 나온 대로예요.
놀뫼 :
하나님의 권능을 느낄 때, 권능의 천사로도 번역됩니다. 이사야나 에스겔에서 나옵니다.
나그네 :
그렇다면 그룹은 힘인 것 같습니다. 이길 수 없는 힘, 즉 두려움, 공포 같습니다. 절대세계로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것들이 죽음, 깨어남, 끊고, 사르고 하는 것 일 때, 빠져있는 것이 힘입니다. 뒷받침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극복해야 하는 힘과 권능.
머슴 :
상대의 세계에서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나그네 :
몸에서 나옵니다.
하늘 :
사랑, 봉사, 희생, 섬김 같은 것들에서 긍정적인 힘이 나오는 것이고 미움, 증오, 질투, 같은 것은 어두운 힘이 되는 것입니다.
머슴 :
그래서 상대세계에서 온갖 힘은 생각에서 나오는 거지요. 생각에서 천사도 악마도 나오는 것이지요. 악마인 루시퍼는 타락한 천사라고 합니다. 근본인 생각이 극과 극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나그네 :
그러니까 그룹이란, 생각에서 나오는 힘 중에서 절대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극복되어야 할 것. 즉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것이네요. 절대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권능과 두려움. 그런 것들을 극복해야 하는데, 바로 그것들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열정의 불에 살라 말끔하게 태워 없애고 빙빙 도는 칼에 단숨에 잘라지듯 에고와 그의 망상을 끊어내어, 완전히 소멸하고 단절한 곳으로부터 아침처럼 깨어나, 넘어갈 수 없는 권능과 같이 느껴지는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해야 절대에 다가갈 수 있다는 메타포가 아닐까요? 왠지 선승들이나 열정적이 구도자들이 하는 얘기와 그들의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머슴 :
네, 삶을 불살라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모두 받아들여라. 아낌없이 삶을 내 놓아라 하는 겁니다. 어떻게 삶이 궁극에서 다를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이런 깨우침을 지금 여기에서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생명과 열정을 지니고 있으며, 작게든 크게든 자신이 알게 모르게 구도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삶을 진정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얼마나 열정을 전체적으로 쏟아 붓는냐에 달렸습니다. 전체를 쏟아 붓고 나서야 뭔 일이 나도 나는 겁니다.
생기 :
아까 착하다는 것이요. ‘착’하다에서, 자기가 없는 상태가 ‘착’한 것이 아닐까 하는데.......
머슴 :
거기서 자기란 에고지요. 가로막는 에고가 없어지면서 self랑 착 붙어 하나가 되어 거긴 self밖에는 없는 거지. 그렇게 현존하는 거지.
생기 :
상대의 세계에서 남에게 착하다고 느낄 때는 남이 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 줄 때 그 남이 착해 보입니다.
머슴 :
그거야말로 상대적인 개념이지요.
생기 :
그렇죠. 근데 착하다는 것이 나-에고를 버리고 self에 착 달라붙는 것인데, 희생이라는 것이 또 남을 위해서 나를 버리는 것이지요.
머슴 :
거 참 좋은 해석이네요. 희생이란 남을 위해서 자신의 에고를 버리는 것. 그런데 거기서 남이 남이 아니지. 그건 근원이라 또 나지. 자신의 에고를 버림으로써 근원에 착 달라붙게 되니 남과 내가 거기서 하나가 되는 것이지. 자신을 버렸다고 하나 남과 하나가 되어 전체를 얻었으니까 더 큰 것을 얻은 셈이지. 그래서 근원에 착 달라붙은 것을 보니 아름답지. 그런 사람이 착해 보이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밖에요.
여기까지 하고요. 책을 소개하겠습니다. 이건 오래 된 건데 마더 테레사의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입니다. 우리가 기도가 무엇인지 많이 얘기 했는데 이건 마더 테레사의 기도입니다. 엑기스입니다. 두 세 시간이면 다 읽어요. 마더 테레사가 과연 그런 분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요. 나는 이걸 우리의 필독서라고 말하고 싶어요. 다음 <인문학의 창으로 본 과학>인데요. 인문학자 열 사람이 자연과학자 열명을 만납니다. 이건 지금 자연과학이 뭘 하는지를 인문학적 입장에서 인문학자들이 쓴 겁니다. 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왜 만나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과학, 철학, 종교, 예술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짤막짤막하니 쉬워요. 다음 이 책은 요즘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지요? 도올 김용옥선생의 <요한복음강해>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보면 기독교가 지금 어떻게 웃기는 짓을 하는지 알게 되겠지요. 지금 기독교계에서 아주 쌍심지를 켜고 개지랄을 떨고 있습니다. 신문에도 났습디다. 어떻게 건방지게 김용옥이가 성경을 풀이하느냐? 이 이야기는 성경이 기독교만의 것이라는 얘기예요. 그럼 성경이 한기총 거냐? 그럼 통합측 거냐? 성경이 어떻게 기독교만의 것입니까? 거기 하나님의 얘기가 있고, 예수의 얘기가 있고, 우리의 얘기가 들어있는데 말예요.
이번에 인도 갔을 때 거기 가이드 한 친구가 고등학교를 인도에서 나오고 대학을 미국에서 나온 친구였어요. 그 고등학교가 우드스탁이라고 유명한 기독교 학교예요. 그는 철저한 기독교 신자이지요. 대대교인예요. 장인어른이 목사님이시지. 중간에 내가 “예수님은 기독교 신자이냐?”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이 친구 점점 맛이 가더구먼. 사람들이 아침햇살님과 내게 목사님, 목사님 하는데, 우리를 겪을수록 영 이상한지 우리보고 이상한 집단이래. 결국 깊이 친해졌지만. 허허허.......
이 책들은 인도에서 건져 온 책입니다.
인도에 가서 인도가 참 매력적이라고 느꼈는데 인도에서 가장 크게 느낀 건, 브라만 새끼들 다 죽여야 돼. 크샤트리아도.
하하하........
햐! 어떻게 그렇게 생각에 매몰되어 있냐? 더군다나 브라만 아닌 거 알면서 거짓 하는 거 아냐?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갈 수 있냐는 거예요. 윤회사상에 매몰되어가지고 수드라 밑에
불가촉천민이라고 있는데 그들은 영원히 불가촉천민이야. 우리 기쁨님과 청량음료님도 보았지만 첸다이에서 힌두교 사원에 들어가는데 길거리에 세 가족이 갓난애까지 데리고 누더기로 그냥 거기서 살아요. 근데 고통스럽지 않은가봐. 싱글싱글 웃어요. 노 프로블럼(no problem)인가봐!....... 근데 고귀한 생명인데. 그들 안에 신성이 있는데.......
물방울 :
그렇게 살면서도 행복할 수도 있겠죠.
머슴 :
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근데 브라만이 그렇게 가르치면 안 되지. 인도의 지도층 새끼들한테 정말 욕 나오더라고요. 정말 씨발놈들이야. 그래서 인도에 부처가 하나 더 나와야 돼. 석가모니 부처는 그 윤회를 끊는 것을 가르쳤거든.
나그네 :
인도는 이미 그 부처를 배척해 버렸어요. 또 나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머슴 :
글쎄말야. 나 이 참 나, 이상한 나라야 인도는. 그리고 몇 날 며칠을 아무 일도 안하고 힌두 축제 때문에 200킬로 300킬로를 걷는데. 그러구선 그냥 민가에 들어가서 걸식해요. 그래서 나는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 무섭구나하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인도는 세계에서 그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성을 일깨우는데 인도는 그 역할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생각을 갖고 있는 한 말이죠. 그래서 재밌는 것이 오쇼나 크리슈나무르티를 인도 사람들은 몰라요. 오쇼 아쉬람에도 인도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다 서양 사람들이야.
나그네 :
그중에서도 제일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래요.
머슴 :
핵심 제자들이 다 서양 사람들이고 그중에 영성을 상업화하고 대중화할 줄 아는 제자가 있었던 거지. 벌써 영성이 상품화되어있어요. 기막히게 대중화했어요. 그런데 너무 영성을 상품화시켜 놓으니까 속에서 거부감이 일어나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오쇼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오쇼를 신격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브닝 미팅이라고 들어가 봤는데, 한 시간 반 정도 하는데 안에서 기침도 못하게 해요. 기침하면 스텝들이 바로 내쫓아요. 오쇼가 엘러지가 있어서 기침을 하면 바로 옮았데. 오쇼가 죽은 지가 언젠데 살아생전 그랬다고 지금 그러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이브닝 미팅이라는 것이 명상 좀하다가 오쇼가 살아생전 설교하던 걸 비디올 틀어줘요. 그리고 끝날 때 오쇼! 하고 소리 지르고 앉았어요. 서양 놈들이. 이건 이미 신격화 된 거지?
또 하나 오쇼 아쉬람 방문에서 감명 깊었던 건 오쇼가 평생 살던 방, 제자들하고 독대하던 방에 들어갔는데 육각의 유리방이고 들어가는 복도에 양쪽이 바닥부터 천정가지 서고예요. 오쇼가 읽었다는 책이 진열되어 있는데 십만 권이야. 하루에 열 권 정도 읽었다네요. 그래서 그 사람 사진을 보면 드러누워서 책을 읽는 것도 있어요. 일주일에 두세 권 읽는다고 자랑할 게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그 복도를 지나가면 한 방이 완전히 거울로 된 방이 나와요. 아주 상징적이죠? 그걸 지나가면 핵심 제자들을 만났던 유리방이 나와요. 거기서 숲에 싸인 비파사나를 위한 길이 오쇼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데 오쇼가 엘러지가 있다고 그 길을 벽과 지붕을 유리로 만들어 덮었어요. 속으로 욕이 나오더라고. 그리고 그 오쇼의 숙소 입구에 롤스로이스가 있는데 오쇼가 대중과 만나는 광장과는 걸어서 5분 거린데 거길 그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녔데요. 사진에는 손목에는 롤렉스 금딱지를 차고 있고요. 과연 상품화 대중화가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나그네 :
오쇼가 그런 상품화와 대중화의 시도를 허락 했데요.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그러건 말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데요.
머슴 :
글쎄 그랬다는데, 매력을 느낀 것은 명상과 영성을 대중화 했다는 건데. 그건 오쇼가 큰 힘을 발휘한 것 같아요. 근데 너무 지나치게 상품화되었다는 느낌이 들고 죽은 지 30년도 채 안됐는데 이미 신격화되었어요.
나그네 :
그런 마스터가 죽으면 꼭 신격화시키는 사람들이 있고요. 그렇게 신격화시키지 않으면 본격적으로 상품화시킬 수도 없지요.
머슴 :
음, 또 그렇기도 하겠다. 그러고 보니 짚어볼 것이, 예수가 상품화 되지 않았나? 특히 요새 교회가 예수를 상품화해서 누가 잘 먹고 잘 살아?
나그네 :
목사요.
머슴 :
후후후....... 그건 대다수 목사 얘기는 아네요. 극소수의 대형 교회에서 그렇지요. 내가 이름 한번 대볼까? 조용x, 곽x희, 김홍x, 김선x, 또 많아요. 김x만....... 이들은 예수 팔아먹는 놈들 아닐까? 상품화해서 말이야. 꼭 상품화가 절대로 나쁜 것이라는 얘기도 어패가 있겠지만요.
나그네 :
오쇼는 자기를 상품화하려는 자신의 제자들의 행위를 허락하면서 그것도 하나의 농담으로 취급했답니다. 인생을 농담처럼 보라는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서요.
머슴 :
음, 비디오를 보니까 오쇼가 농담 자체를 무지 좋아했던 것 같아요. 강의 중에 농담이 많이 나오고 모두 깔깔깔 웃고 하더라고요. 근데 몸 관리는 정말 안했나봐. 사람들 모두 일어나 춤추는데 앉아서 팔만 약하게 흔들고 있더라. 크리슈나무르티는 90세를 넘어 살았는데 오쇼는 60 조금 넘겨서 죽었다지요?
그리고 두 번째로 오르빌에 갔었고 세 번째로 마하리쉬 아쉬람을 갔었습니다. 거기 마하리쉬 아쉬람은 힌두 사상에서 못 벗어났어요. 거긴 들어가자마자 온통 흙바닥예요. 마하리쉬가 득도할 때 흙바닥에서 했다고 관광객들 모두를 흙바닥 위에서 신발을 벗깁디다. 그래서 서양 놈 하나는 스텝이 뭐라고 하니까 성질내고 가버립디다. 거기 일본 여자가 하나 스텝으로 있었어요. 영어가 되니까 우리에게 설명을 쭉 해줬어요. 2000년도부터 거기 있었데요. 그런데 누가 물었어요. 넌 여기 있는 걸 다 배워 통달했는데 왜 일본에 안가고 여기에 남아 있느냐? 그랬더니 일본에서는 깨달을 수가 없데요. 일본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는 곳이래요. 내가 속으로 알 거 다 알았으면 일본에 가서 전해야지 뭐 하러 7년씩 여기에 있나하고 생각했지요.
나그네 :
중독 되어서 그래요. 중독자들 많아요. 오쇼도 얼마나 사람들을 버려놨는데요. 나가서 돈 좀 벌면 그 돈으로 아쉬람 들어가 살고, 돈 떨어지면 다시 제 나라 가서 돈 벌어 다시 오고....... 머릿속에는 온통 아쉬람 들어 갈 생각 뿐예요. 사람들하고 어울려 세상을 살려고 하질 않아요.
머슴 :
오쇼의 최측근 이너 써클 중에는 비즈니스의 귀재가 있나봐. 유대인들이 많다구? 이건 완전 기업화 되어있어요. 하루에 100불이 넘는 게스트 하우스는 일년 전에 예약을 해야 한데요. 서양 애들은 휴양차 오는 거더라고요. 휴양지로서의 상품성을 개발한 거지요. 그들은 영성 때문에 오는 것 같지 않아요. 하긴 프로그램 가지고 워크샵도 많이 하긴 하더라고요. 그리고 한국 애들도 많아요. 동양인들 중에는 한국인이 제일 많다고 합디다. 그러나 동양인은 10%도 안돼요. 그리고 아쉬람은 수영 풀장과 테니스장도 있고 아주 현대화되어 있어요.
기쁨 :
거기 들어갈 때 자주색 옷을 사 입어야 되요.
머슴 :
맞아 맞아. 네, 그 옷을 팔아요.
나그네 :
로브라고 하죠. 그 옷을 입을 때 속에는 팬티도 안 입는 거 아세요? 후후후.......
머슴 :
허허허, 우리는 팬티 입고 입었는데. 나그네님은 그쪽 수련을 오래해서 아는구나. 그래서 우리 스무 명이 그 옷을 다 사 입고 들어갔는데, 이브님 미팅에서는 또 하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또 샀지 뭐. 집에 와서 잠옷으로 입어봤더니 참 좋아. 하하하.......
하하하.......
나그네 :
그 이브닝 미팅이라는 것이 원래는 이브닝 사트상이라고 하는 것인데 사트상이라는 것이 스승을 친견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비디오를 틀어주는 거예요.
머슴 :
그래서 신격화되어가고 있다는 거야. 스승을 친견하는 거라면 스승이 없어지면 그 사트상이 없어지거나 제자가 새로운 스승이 되어서 직접 나오든가 해야지. 이런 식이라면 오쇼교도 생길거야. 예수가 죽고 나서 기독교가 생겼듯이. 예수는 기독교 만들라고 안했거든.
오쇼 아쉬람에서 또 재밌는 것이 쿠폰을 팔더라고요. 현찰 거래가 안돼요. 별도의 경제단위가 될 정도로 거대기업화 되어있어요. 그 옷을 파니까 밖에서 인도 애들이 그 짝퉁을 싸게 팔고 있어요. 그나마 그런 일거리를 주었으니 오쇼가 인도인들에게 조그만 선물은 한거지? 후후후.......
그러고 나서 일주일 지나고 나서 쿠다파 지역에 가서 한국 여자 목사님이 선교하는 지역을 갔어요. 들소리님이 거기서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개척교회도 합디다. 거기 가서는 4일정도 고생 좀 했어요.
물방울 :
소가 진짜 왔다 갔다 해요?
머슴 :
왔다 갔다 뿐 아니라 차도 한가운데 떡 드러누워 계신다니까요.
하하하.......
머슴 :
소를 키우면서 소똥은 땔감하려고 동그랗게 해서 벽에 붙여놨어요.
물방울 :
그럼 소는 죽을 때까지 키워주는 건가요?
머슴 :
그럼요. 그런데 우마차가 있어서 소를 짐을 나르게는 합디다.
나그네 :
소님 건강을 위해서 적당히 운동은 시켜드려야지요. 하하하.......
머슴 :
이번에는 아쉬람을 중심으로 힌두와 영성을 위주로 남인도만 봤는데 북인도는 다른 의미가 있어요. 다음에 가 봐야 해요. 불교 유적을 보는 여행을 해봐야죠. 음식은 청량음료님에게 물어봐요. 청량음료님은 냄새난다고 달걀도 못 먹었어요. 음식 때문에 고생 많았지. 인도에 가서 음식에 적응을 잘 한 사람을 꼽으라면 네 사람인데 나 머슴도 그중 하나로 들어갑니다. 포크를 주는데도 맨손으로 먹었어요. 맛있더라구.
놀뫼 :
맨손으로 먹으니까 더 맛있어요?
머슴 :
그럼, 포크로 먹는 것보다 더 맛있지.
하하하.......
머슴 :
뿌나에서 오르빌까지는 호텔식을 했어요. 그러다가 마하리쉬 아쉬람부터는 인도 음식을 제대로 먹었지. 거기서 점심은 순례객들을 큰 방에다 넣고 줄지어 앉혀요. 흙바닥에 앉아서 바나나 잎사귀를 줘서 바닥에 놓게 해. 그리고는 양동이에 밥, 카레, 요구르트를 담아와서 가지고 다니며 그 바나나 잎사귀 위에 퍼 줘. 그럼 그걸 손으로 집어 먹는 거예요. 그걸 청량음료 아우님은 못 먹었지요. 저는 한국에서도 원래 인도 음식을 좋아했어요. 그리고 아침에는 밀떡을 많이 먹어요. 이름이 도사예요. 그게 쌀가루를 부친 거더라고요. 거기에다 양파를 다져서 넣었는데 그걸 카레에 찍어서 먹는 맛이 끝내주더라고요. 그 도사는 한국의 인도 음식점에서 못 먹어봤어요. 그것도 청량음료 아우님은 입에도 못 댔어요.
그리고 한국에 와서 며칠 쉬고는 우리 셋은 212기 설 깨어나기에 들어갔어요. 기쁨님, 청량음료님, 그리고 나.
물방울 :
청량음료님의 긴 여행으로 남편이신 놀뫼님이 힘드셨겠다.
놀뫼 :
제가 너무 무리했다니까요.
하하하.......
머슴 :
웬걸, 공항에서도 다시없는 기회라고 놀뫼님이 아내인 청량음료님 등 떠밀었다니깐.
기쁨 :
하하하....... 남편은 저런 사람으로 얻어야 해.
하하하.......
머슴 :
요번 하비람의 설깨기는 기록 세웠어요. 62명이 들어와서 스텝까지 72명이었어요. 깨어나기만 60명 넘은 것은 처음이야. 야, 진짜 많더라. 선생님이 심각한 고민에 빠졌어요. 합창홀로 올라가야 하는지....... 깨기 방이 너무 좁아서 고민 중예요. 강당에서 하면 또 잠자는 것 때문에.
물방울 :
또, 올라가면 열기가 덜 할 것 같아요. 갑갑한 것도 있어야 하는데.
머슴 :
으음, 또 그런 게 있네. 강당에서 수련하고 거기서 재우자는 얘기도 나왔는데 그럼 또 밥은 내려와서 먹어야 하거든....... 그리고 오쇼에서 배워 온 것 중에 유니폼 입는 거. 수련생들은 다들 못 입혀도 경축 때 춤기도 하는 스텝들만이라도 입혀보자는 얘기를 했지. 그건 곧 실현될 것 같아. 아마 들꽃님이 이미 만들기 시작했을 걸? 얘기가 너무 길어요? 당신은 다녀왔으니까 길구....... 자, 그럼 마음나누기를 하십시다. 놀뫼님부터.......
놀뫼: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은 네오를 향해 항상 미스터 앤더슨이라고 가상의 세계의 이름을 부르고 네오는 ‘나는 네오’라고 강변합니다. 우리 모임을 통해서 자꾸 의식을 깨어나게 하여 상대세계의 나와 절대세계의 나를 잊지 않아 매트릭스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청량음료 :
머슴님과 함께 인도를 다녀오고 구정깨기에도 다녀왔습니다. 인도에서 차선도 없고 돼지, 개, 소, 원숭이들과 같이 살고 길거리에서 밥 먹는 사람들을 보며 복음성가가 생각났어요. ‘기쁨의 그 나라.......’ 우리는 더럽다고 느끼지만 그것을 모르는 그들에게는 그곳이 복음성가 속의 그 나라일 수 있겠지요.
용어 때문에 벽에 부딪치는 일이 있어요. 상담을 할 때 용어들에서 부딪치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깨어나기에서 쓴 용어들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어제 같은 경우 전생이란 말이 튀어나왔는데 이단이라고 하더군요. 전생이란 말을 썼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거예요. 저에겐 눈을 떴다고 나온 말들도 그들에게는 생각의 기준이 배척하는 말이 되더라고요. 선생님이 마지막에 맑은 물 붓기 할 때 서화담 얘기를 하시잖아요. 그 얘기가 실감나더라고요.
하별 :
하나님이 지은 질서가 있겠구나. 인도의 질서, 한국의 질서, 나의 질서가 있겠구나. 좋은 이야기 차츰 더 많이 들을 것 같구요. 저도 쿠바를 다녀오고 녹색과 혁명과 사회주의의 나라가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더라구요. 사람 중심, 생명 중심, 생태, 공동체 중심인 사회가 그 나름대로의 질서와 가치관 속에서 살고 있는데 과연 한국에 살고 있는 나의 질서는 어떤 것일까.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뱃사공 :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나그네 :
인도를 다녀오신 후 머슴님에게서 에너지가 넘치는 것아 느껴집니다. 뭔가 달라지신 것 같아요. 더욱 깨달음에 다가가신 건지....... 아멘.
생기 :
저도 나그네님 말에 공감하구요. 머슴님으로부터 힘이 더 느껴지고 있습니다. 집이 있으니 떠날 수도 돌아갈 수도 있다는 말씀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나도 마음껏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그완 :
하비람 영향을 받고 살고 있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저는 개념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느껴져서, 더 잘 듣고 현실에 지금 여기의 나에게 더 깨어서 더욱 사실에 다가가고 싶습니다. 아멘.
자연 :
아까 읽어주신 놀라움이란 시를 듣고 그동안 나는 놀라움 없이 살았구나. 그것은 기계적으로 산 것이다.라고 느꼈습니다. 기쁨은 없고 새로움도 없다보니까 오히려 불안, 두려움은 커지고 있었는데 왜 그러지? 하고 묻다보니까 기계적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이 보여요. 밥을 먹으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깨어나는 느낌이 있어서 똑 같은 길을 오면서 다른 마음을 갖고 왔는데, 여기서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 듣고 있는 나, 음악을 만든 사람, 연주자, 기계가 있고, 음악을 통해 조화롭게 하나가 된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어서 기쁘고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었을 때 막막한 느낌이었는데 그것을 상대와 절대로 풀어주시어 명료해져서 놀랍고 놀라웠습니다. 아멘
물방울 :
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으면 끝이야. 라고 얘기합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오늘 여기서 그 얘기가 맴맴 돕니다. 죽으면 여기서 끝이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보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행복하게 이 순간이 여기에 있구나. 내가 이걸 알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사람들이 안타까워지는 겁니다.
머슴 :
자신이 먼저 다 차면 자연스럽게 전해져요. 못 전해질까봐 걱정하지 마세요. 예수도 다 찼기 때문에 전한 겁니다. 역량이 안 된다는 건 생각이고. 에너지가 다 차지 않았더라도 물방울님, 이대로 말을 안 해도 삶을 통해서 기운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우님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국 :
오랜만에 뵈어서 반갑고요. 음악을 들으면서 장엄하게 걸어가는 듯한 힘을 느꼈습니다. 가슴으로 힘을 느꼈습니다. 설 명절 때 항상 집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집을 떠났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떠났습니다. 단식수련 3박 4일을 다녀왔습니다. 늘 마음에서 영혼에서 받아들이곤 하는데, 몸도 담을 수 있으니 몸도 담아 받아들이는 것을 봐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 단식수련을 떠났습니다. 입으로 먹는 밥이 내 몸이 된다는 것. 이제는 진정으로 나와 밥을 하나로 만들고 싶습니다. 다녀와서 굉장히 만족스럽고요. 다녀와서 어머니하고 이모님 모시고 침도 맞고 하는 요양원을 다니면서 거기 늙으신 분들을 보며 건강도 저축하듯이 하며 살아야겠다고 느꼈습니다.
기쁨 :
작년 구정 때 깨어나기 들어갔었구요. 이번에 구정깨기에 들어가서 1년 만에 수련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수련이 굉장히 많이 업그레이드되고 정돈되고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굉장히 많이 노력하시는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되고, 명료하고 심플해서 좋았습니다.
머슴 :
선생님이 대굴빡 형에게 맞춰 가시는 것 같아요. 요즘 설명이 더 많아졌어요.
하하하.......
기쁨 :
호호호....... 네 그런 것 같아요. 깨어나기 갔다 오니까 이런 오늘 말씀이 더 공감되면서 바로바로 전달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본 몇 개의 단체의 수련과정을 보며 하비람에서 하는 것이 정말 세계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선생님이 많은 것을 수집하셔서 우리를 위해 너무너무 노력해 주신다는 것을 느끼고 감사했습니다. 다른 것 할 것 없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수련을 하나하나 해나가면 우리의 목표점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아멘.
하늘 :
마지막에 그룹과 불칼의 말씀을 들으면서 고3때 공부하면서 만화책 본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 제목이 <아르미안의 네 딸들>인데요.
자연 :
아! 아르미안의 네 딸들.......
머슴 :
어? 자연님도 아는 거예요?
자연 :
명작입니다. 호호호.......
머슴 :
둘이 동기니까 아는구나. 허허허.......
하늘 :
오죽하면 저 같이 틀에 박힌 사람이 그걸 도서실 책장 위에 놓고 그걸 봤겠습니까? 그 책이 고3 때 시작해서 대학교 3학년 땐가 끝났습니다. 그 만화책에서 왕국의 네 번째 딸이 불새의 깃털을 가지러 떠납니다. 결국 나중에 자신이 스스로 불새임을 알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 친구들이 많이 생겨요. 그 친구들이 하나같이 그녀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운명같이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기꺼이 그녀를 위해 희생을 합니다. 나아갈 때마다 난관과 장애물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그룹과 불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마다 주인공은 자신을 불사르고 생명을 던지는 친구들의 희생과 사랑으로 난관과 장애를 극복하여 자신을 향해 찾아갑니다.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남들의 사랑과 희생으로 가능하다는 측면을 봅니다. 포기하고 싶어 하는 과정들이 있는데 정말 어려운 것이야말로 나를 찾아가는 길에서는 통과해야 하는 통과의례가 아닌가 합니다. 오늘 그룹과 불칼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장면들이 마구 떠올랐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사랑도 그것을 통과하는 힘의 바탕이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숙연해지기도 하고요. 또 통과해야 할 것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생명의 나무도 그룹과 불칼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만화에는 죽을 수 있는 인간을 질투하는 신들의 장난이 나오는데 신들보다 더욱 강력한 돌연변이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깊은 의식 속에 죽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들고 돌연변이가 커가면서 신들은 죽어갑니다. 그래서 신들도 행복해하며 죽어갑니다.
만화책 속에도 이렇게 나를 사로잡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번 읽어보십시오. 정말 재밌어요.
머슴 :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뱀 얘기부터 시작됐잖아요? 무슨 일 때문에? 라고 물었을 때, 의심 유혹 때문이란 말이지요. 그러나 상대세계에서는 의심 유혹이 없으면 문제해결을 못합니다. 상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의심해야 되는 겁니다. 하비람식으로 고치면 자꾸 물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묻고 자신에게서 해결이 안 되면 선생님을 찾아가서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절대를 잊지 않으려면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통과의례입니다. 이 통과의례를 못 거치면 생명나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광고입니다. 양평에 있는 사랑하는 신정님이 고로쇠 물을 보내왔습니다. 오늘 실컷 잡수세요. 모두들 간식 때 실컷 마시고 집에도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3월에 가기로 한 설아다원은 4월에 가면 차를 따서 만드는 작업을 직접 할 수 있답니다. 간식을 먹으면서 시간을 조정해 봅시다.
자 그럼 그리스도의 기도 세 번으로 오늘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 완전 충만 일체 은혜 감사. 그리스도 완전 충만 일체 은혜 감사. 그리스도 완전 충만 일체 은혜 감사 아멘.
자리를 치우고 빵과 박스로 가득 실려 온 고로쇠 물을 부엌에서 가져다가 중앙의 원목 테이블에 놓고 서로 어깨들을 부비며 둘러앉았다. 컵에 가득 따라 마시는 고로쇠 물은 달콤하였다. 오늘은 풍성한 빵을 고로쇠 물과 함께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며 축복을 만끽하는 2월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일이 행복할 거라고 믿고 살까? 아니면 씁쓸하고 쓰릴 것이라고 믿고 있을까. 람스 안의 이들은 최소한 지금 여기서 내일이 없다. 빵과 물과 도반들의 웃음과 목소리와 자신의 가슴에 샘솟는 기쁨에 취해 있었다.
8. 화가 날 일입니까?
2007년 3월 4일. 3월의 첫 번째 일요일이다. 오후부터 내리는 비는 점점 굵어져 가고 있었다. 비가 그치면 오늘 밤에는 바람이 불고, 뒤를 이어 꽃샘추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3월에는 꽃들이 찾아온다. 추위가 그들을 시샘하여 마중하듯 수그렸던 고개를 든다는 것은 사라져가는 것들이 결코 죽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처럼 보인다. 일어나고 스러지는 생명을 추위조차도 가지고 있나보다. 추위는 꽃들을 시샘하여 마지막으로 존재를 시위하곤 자취 없이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러나 또 몇 달이 지나면 추위는 다시 태어나 낙엽을 휩쓸어 몰아내며 우리의 늙어감을 깨우듯 다시 찾아올 것이다. 야박스럽게 보이는 꽃샘추위는 사실은 그 꼬리가 등 뒤에 가리고 꽃을 슬그머니 불러내는 손짓이다. 추위가 꽃들을 시샘한다고 꽃들은 추위와 싸우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 꼬리를 물고 세상에 등장을 하니, 꽃들은 추위를 미움 없이 바라보다가 추위가 사라져감을 살포시 감지하여 그 사라짐의 발자취를 신호삼아 추위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자리를 겸손하게 채우는 것이다. 꽃들은 그 사라져가는 추위의 꼬리를 이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활짝 자신들을 피워내곤 또 거침없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너무나 잠깐 이 세상을 방문하는 예쁜 꽃들은 자신들의 짧은 삶을 다른 긴 삶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들의 태어나고 스러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는 만큼 오래 사는 것이 행복일까? 우리는 그들의 생을 따라 수없이 기뻐지고 슬퍼지는데.......
잔잔한 음악이 람스 홀에 아련히 흐르고 있다. 자궁 속의 알맞은 밀도의 양수처럼 음악은 람스 홀을 가득 채워가고 있었다. 머슴과 기쁨은 일찍 도착하여 사람들을 위한 앉은뱅이 의자와 방석을 배치하였다. 그 자리를 채우러 마치 3월의 꽃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 듯 하늘, 민들레, 자연, 수국, 하별, 나그네, 뱃사공과 물방울 부부, 생기, 두잉, 여백, 지혜, 그리고 소리가 미소를 머금고 들어섰다. 한 사람, 두 사람 홀에 들어설 때마다. 음악은 잔잔한 파문으로 매번 놀란다. 등장은 항상 새로움의 빛을 품어내게 하여 세상을 놀래키는 것이다. 눈꺼풀의 한번 감았다 뜸이 세상을 온통 등장시키기도 한다. 작은 기침에도 가슴은 한껏 놀래기도 한다. 매번 깨어날 때마다 아침이듯이 꼴의 변화도 아침 같은 새로움을 매번 폭발시키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음악이 멈추어 짙은 침묵이 찾아온 듯하더니 중앙 원목 테이블 위에 피어오르는 향을 향하여 얼굴을 두고 둥그렇게 둘러앉은 가볍게 눈을 감은 명상의 존재들 사이로 공이 세 번 울린다. 머슴의 목소리가 들린다.
장자가 숨을 거두려 할 때 제자들이 화려한 장례식을 준비했다. 그러자 장자는 말했다. 하늘과 땅이 나의 관이요. 해와 달이 내 옆에서 짤랑대는 구슬이고 행성과 별자리들이 내 주위에서 반짝이는 보석들인데, 만물이 밤을 새워 나를 애도할 텐데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이냐. 모든 게 넘치게 준비되어 있구나. 그러나 제자들은 말했다. 스승님이 까마귀와 솔개에게 먹히면 안 되지요. 장자가 대답했다. 그런가? 땅에 놓아두면 까마귀나 솔개가 먹을 것이요. 땅 밑에 누우면 개미나 벌레가 먹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먹힐 텐데 너희들은 왜 새들에게 더 인색한가?
고구마를 먹는데요. 하던 버릇대로 껍질을 까서 먹는데요. 거의 다 먹었을 때 접시에 벗겨놓은 껍질이 뭐라고 하는 겨예요. 고구마는 사람을 나누지 않는데, 나눠서 이 사람은 좋아하고 저 사람은 싫어하고 그러지는 않는데, 왜 사람은 고구마를 나눠서 이 고구마는 버리고 저 고구마는 먹느냐고, 고구마 껍질도 고구마라고, 왜 그러는 거냐고. 나는 그만 할 말이 없어서 벗겨놓은 껍질을 얼른 입에 넣었지요. 그리고는 미안하다고. 버릇이 들어서 그랬다고. 다음에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고구마 껍질도 알았으면 됐다고 미안할 거 없다고 말했습니다.
머슴이 다시 음악을 틀자 전기기타가 느린 비트를 토해내며 음악을 이끌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머슴의 말의 여운에 잠긴 사람들의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드럼 소리가 울려 퍼지며 점점 강해져간다. 하늘의 눈 감은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리고 드럼의 경쾌한 리듬은 하늘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하별은 목운동을 하듯이 고개를 완만히 돌리기 시작한다. 양손을 무릎 위에서 마주 잡더니 머리 위로 치켜 올렸다가 천천히 내린다. 그의 몸이 요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음악을 타는 몸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허용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질 때쯤에는 하늘의 손가락 하나가 박자에 맞추어 까딱까딱 한다. 그녀의 몸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의 몸도 드럼의 경쾌한 박자에 미약한 떨림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람스 홀에는 새싹이 돋아나듯이 푸릇푸릇 춤이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몸에 춤이 일어날 때 그것을 허용하면 생각이 멈춘다. 그래서 줌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춤추는 자가 사라지면 거기에 춤만 남는다. 춤추는 자가 등장하기 전에 춤이 일어나고 그 사실에 놀라지 않고 그윽하게 그것을 허용할 때도 춤은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러면 내맡김은 자유를 수유한다. 달콤한 자유는 온몸의 허기를 채우고 급기야 흘러넘친다.
언제 그칠지 아무도 상관하지 않던 음악이 가라앉자. 하늘이 오늘의 기도를 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춤에 씻기운 사람들을 어루만진다.
‘오늘은 내 생애 처음 있는 날입니다.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입니다. 오늘을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지금 내가 여기 있음을 참 감사합니다. 흐린 하늘 저 너머 태양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새벽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흐름이 내 생각과 같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내 삶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순간을 살게 하시고 사이를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3월, 봄으로 새롭게 하시고 낯설음으로 설레게 하시니 또한 감사합니다. 매일 기쁘고 충만하게 느끼고 누리며 창조하며 살겠습니다. 아멘.’
트럼펫의 장중한 연주가 하늘의 기도의 배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내놓은 기도를 싣고 트럼펫의 음률은 높은 하늘에 가 닿고 있었다. 이 트럼펫 연주는 하비람 영성훈령 중에 자신이 찢어버린 에고를 쓸어 담을 목관이 입장할 때 들었던 음악이었다. 뒤이어 또 하나의 낯익은 음악이 경쾌하게 흘러나왔다. 하덕규의 ‘자유’였다. 화장(火場)의 마지막에 탈진 상태의 몸과 정신을 흔들던 음악이었다.
자유~ 자유~ 자유~
껍질 속에서 살고있었네 내 어린 영혼
껍질이 난지 내가 껍질인지 모르고
껍질 속에서 울고있었네 내 슬픈 영혼
눈물이 난지 내가 눈물인지 모르고
.......
자연이 몸을 좌우로 흔들더니 발가락을 까딱이기 시작하였다. 충만한 기운이 몸의 첨단인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으로 품어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기쁨은 팔장을 낀 채로 미풍에 흔들리듯 몸이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어린 아이의 그것처럼 순수하였다. 하별이 양손을 하늘로 향했다가 합장을 하더니 몸 앞으로 천천히 내렸다. 물방울이 몸을 흔들다 미소를 띠운다. 나그네는 어느덧 노래를 따라 부른다. 기쁨도 참지 못하고 노래를 따라 부른다.
음악이 그때처럼 영혼을 휩쓸고 지나갔다. 음악이 그치고 머슴이 오디오에서 자리로 돌아오면서 모두에게 물었다.
시방 느낌은?
자연 :
좋아요.
나그네 :
확 올라옵니다.
머슴 :
왜요?
나그네 :
저는 저 노래에 조건반사식으로 감정이 엮여 있나봅니다. 깨어나기에서 저 노래를 들었을 때 눈물이 흘렀습니다. 화장(火場)이 끝나고 축 늘어져 있을 때였죠.
머슴 :
호오.......
하하하.......
머슴 :
오늘 애기 할 창세기 4장이 바로 화장(火場)의 주제가 되는 것이라서 틀었습니다. 여기 칠판을 보면 우리가 하비람에서 화장(火場)을 할 때 아침햇살님에게 들은 얘기를 적어 놓았습니다. 검은 글씨가 그것이죠;
파멸 <------- 화 에너지 ------>창조 ------- 일, 직장
인생의 意味 -----------> 眞理 (밥) ----> 살맛
타락 <------- 성 에너지 ------>사랑 ------- 가족, 가정
인생의 目的 -----------> 存在(생명) ---->살집
화(火) 에너지와 성(性) 에너지가 오른쪽으로 가는 것이 긍정적인 경우고 왼쪽으로 가는 것이 부정적인 경우라는 것이지요.
인도에서 제가 얻은 화두가 하나 있다고 했지요? ‘집이 있어서 떠날 수도 있고 되돌아갈 수도 있다’ 인생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이 바로 집입니다. 붉은 글씨로 써 놓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 얘기의 핵심입니다. 자, 창세기 4장 1절부터 16절까지 읽읍시다.
가인과 아벨
4장 1절 :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2절 : 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3절 :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절 :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주님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받기셨으나
5절 :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6절 :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씁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7절 :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8절 :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9절 : 주님께서 가인에게 물어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절 :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11절 :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어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12절 :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13절 ; 가인이 주님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14절 :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15절 :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16절 : 가인은 주님의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
한사람이 한 절씩 돌아가며 읽었다. 읽기를 마치자 머슴이 토라의 번역을 읽는다.
4장 1절 :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그녀가 말하였다. “내가 여호와와 함께 남자를 창조하였다.”
2절 : 그녀가 다시 그의 형제 헤벨을 낳았다. 헤벨은 양을 치는 자였고 카인은 땅에서 일하는 자였다.
3절 : 날들 끝에 카인이 그 땅의 열매들 중에서 여호와께 제물을 가직고 왔다.
4절 : 그리고 헤벨 역시 그의 양의 첫 새끼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왔다. 여호와께서 헤벨과 그의 제물은 눈여겨보셨다.
5절 : 그러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눈여겨보지 아니하셨다. 그래서 카인은 매우 화가 나서 그의 얼굴이 떨어뜨려졌다.
6절 :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왜 네가 화를 내며 왜 네 얼굴이 떨어뜨려졌느냐?
7절 : 만약에 네가 옳다면 얼굴을 들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만약에 네가 옳지 못하면 입구에 죄가 도사리고 있어 그것의 갈망이 너에게 있을 것이다. 그래도 너는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
8절 : 카인이 그의 형제 헤벨에게 말하였다. 그들이 그 들에 있을 때에 카인이 그의 형제 헤벨에게 일어나서 그가 그를 죽였다.
9절 :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 헤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말하였다 “나는 모릅니다. 내가 나의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10절 : 그러자 그가 말씀하셨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들어라. 네 형제의 피가 그 땅으로부터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절 : 이제 너는 저 들을 밟을 것이다. 네 손으로부터 죽은 네 형제의 피를 취하기 위하여 입을 벌린 그 땅으로부터
12절 : 네가 그 땅에서 일할 때 그것의 힘이 너에게 더하지 아니할 것이다. 끝없는 방랑자로 너는 그 땅에서 있을 것이다.
13절 : 카인이 여호와께 말하였다. “나의 죄, 벌이 짊어지기에 무겁습니다.
14절 : 보십시오. 당신께서 나를 오늘 그 땅에서 쫓아내시면 나는 당신의 얼굴로부터 숨겨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땅의 끝없는 방랑자가 되고 나를 만나는 모든 자들이 나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15절 :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카인을 죽이는 사람은 누구든지 일곱 배의 복수를 받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를 쳐죽이지 못하도록 표시를 하셨다.
16절 : 카인은 여호와로부터 나가서 에덴의 동편 놋 땅에 살았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오래 전에 카인의 후예라는 영화도 나왔는데 여러분들은 카인의 후예입니까, 아벨의 후예입니까?
민들레 :
둘 다 섞여 있습니다. 호호호.
머슴 :
둘 다 섞였어요? 카인의 후예는 누가 카인의 후예입니까? 바로 그 다음 절을 우리가 다음 주에 볼 것인데 카인의 후예가 쭉 나오고 이어서 아담의 자손들도 나와 족보가 쭉 풀립니다. 여러분들은 카인과 아벨 얘기를 들으면 느낌이 어때요?
하별 :
하나님이 카인의 제사도 좀 받아주시지 왜 안 받아 주셨을까하는 생각도 좀 들고....... 카인이 내 할아버지구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후후후
머슴 :
중간에 얘기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은 왜 카인의 제물은 안 받아요? 그리고 아벨 것은 받으셨대요. 그리고 왜 예배 들여요? 제물 바쳤다는 것이 예배 들이는 건데, 왜 예배 들여요? 하나님이 예배들이라고 그랬나? 하나님이 ‘나를 예배 들여라’ 라고 했어요?
민들레 :
감사하느라고 예배를 들입니다.
머슴 :
그럼 예배가 뭐야? 감사하면 들여진다는데, 그럼 예배는 뭐야?
하별 :
하나님께 내가 왔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 아닙니까?
머슴 :
응, 또....... 예배는 뭐유? 아, 주일날 교회 가서 설교 듣고 찬송 부르고 하며 기도하는 것이 예배 아냐? 여기 교회 오래 다닌 사람 많잖아........ 교회 한번도 안 가본 우리 나그네님은 예배가 뭐라고 생각해?
나그네 :
햐, 글쎄요. 상대세계에서 열심히 살다가 한번 절대를 돌아보는 것을 의식화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것이 셀리브레이션(celebration) 같아요. 아니 셀리브레이션(celebration)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축이죠. 절대를 만나는 순간 절대와 일체가 되어 모든 것을 던져 넣는 폭발의 행위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절대와 만나는 행위가 예배 같습니다.
머슴 :
으응....... 좋은 얘기예요....... 근데 진짜 카인 것은 안 받으셨나?
여백 :
카인 것은 안 받으셨다고 했는데, 여기 성경에는 반기지 않으셨다고 되어 있지요. 토라에는 눈여겨보지 않으셨다고 되어있습니다. 눈여겨보는 거나 반기는 거나 그것은 사랑인데, 통일교에서는 부모의 심정의 측면을 강조를 합니다. 자식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부모의 심정이지요. 그리고 그런 부모의 심정에 먼저 택함 받은 아벨이 전도하는 자의 상징이 되고, 전도하는 자는 전도 받는 자의 신앙의 부모가 되는데, 부모가 된 전도하는 자는 전도 받는 자가 성장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돌봐야 한다고 합니다. 그때 전도 받는 자가 신앙의 자식이 되는데, 후에 택함을 받으려 했던 카인을 상징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카인은 아벨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교리입니다.
머슴 :
그러니까 통일교도 원죄론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네? 인간이 결국은 죄인이다 이거네? 근데 지난주에 우리는 원죄로 보지 않았거든? 우리는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문선명씨도 백그라운드가 기독교 사상이라는 거지요. 원죄론이라는 것이 서구 기독교 사상에서 온 것이거든. 이원론적인 것 말예요.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서 한글 자료가 별로 없는데, 시공사에서 하나 나와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봤는데, 선악, 지옥, 천당이 다 이 조로아스터교에서 시작됐더군요. 그게 서양사상에 영향을 주었더라고요. 반면에 인도와 중국은 절대 그렇게 안봅니다. 더군다나 중국 사람들은 이곳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은 왜 왔나? 이런 거 잘 안 따져요. 현재에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중국 사람들이 신(神) 개념이 없는 것이 아니지요. 상제와 같은 신의 개념, 근원적 개념은 있습니다.
근데 ....... 진짜 안 받았을까?
하늘 :
받고 안 받고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머슴 :
그렇지....... 받고 안 받고는 어디서 와요?
하늘 :
그건 상대적 개념에서 오지요.
머슴 :
여기서 기록의 형식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쓴 거지만,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입장을 글로 쓰냐구? 그러니까 다 지 생각이지. 그러니까 이건 분명히 카인이 그렇다고 생각한 겁니다. ‘동생 건 받는데 내 건 안 받네.’ 라고 생각한 거지.
여백 :
하나님이 받는다, 안 받는다가 생각입니까, 사실입니까?
머슴 :
생각이지. 우리가 공통경험이 있어서 일치된 행위로 받는다, 안 받는다가 사실처럼 보여지지만, 그 양반이 판단하시나? 이건 순전히 사람 생각이지. ‘받았다. 안 받았다’ 하는 것. ‘눈여겨봤다. 안 봤다’도. 에고가 없어서 너와 내가 없는 데 받고 안 받고가 어떻게 성립하나? 설령 이야기 구조를 따라 안 받았다고 치자. 그게 뭔 상관이야? 예배를 왜 드리는가? 자신의 에고 없음을 경축하는 자리에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그래서 카인은 전형적인 우리의 에고를 상징하는 겁니다. 자 그럼 아벨을 봅시다. 아벨은 어디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 등장하되 한 마디 말도 없을 뿐 아니라 생각조차도 안 나옵니다. 그럼 아벨은 뭐야?
뱃사공 :
셀프(self).
머슴 :
그럼요. 셀프(self)야. 아벨은 그냥 있어요. 말 없는, 생각 없는, be. just be.......
자,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4장 1절 성경과 토라입니다;
4장 1절 :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4장 1절 :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그녀가 말하였다. “내가 여호와와 함께 남자를 창조하였다.”
먼저 3장을 볼 때 우리에게 핵심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절대의 세계에서 상대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거지. 그래서 상대의 세계에서 다시 절대의 세계로 가려면 그룹과 불칼을 거처가야 한다. 여기서 신학적 해석을 보면 그룹과 불칼이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라고 보지요. 근데 그걸 또 보혜사라고도 얘기합니다. ‘내가 떠나면 보혜사,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에게 올 것이다.’ 이런 표현이 요한복음에 있어요. 김흥호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의 개념이 무엇이냐? 그것은 중보자인데 그분이 비유하시길, 하나님은 태양, 인간은 지구, 그리고 그리스도를 달이라고 해요. 태양의 빛은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나 강렬한 태양 빛을 직접적으로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중간에 달빛이라는 부드러운 빛으로 끊임없이 인간을 빛에 접촉할 수 있게 일깨우고 도와주는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만 그런 중보의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고의 중용이 중보자, 보혜사의 개념과 같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중도를 강조하는 것도 이것과 통합니다. 이렇게 중보, 중용, 중도가 있는 한 이분법적인 타락이니 죄인과 심판 같은 걸로 보지 말자는 얘기입니다. 3장의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는 물음 자체가 타락, 죄인, 심판의 개념이 개입된 것이 아니라, 네가 상대의 세계에 왔구나! 하는 거지요. 왜? 선악을 알게 되어서! 선악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아시잖아요. 주기철 목사님의 평가가 이등박문과 안중근 얘기 같이 선악의 상대적 개념 얘기의 대표적인 것이 될 수 있는데, 주기철 목사님이 한국 기독교에선 순교자거든? 근데 일본 재판 기록에 보면 국가 체제 전복죄야. 국가 보안법 위반이야. 범죄자란 애기지. 그래서 지금도 한국 기독교가 그걸 갖고 싸워요. 신사 참배를 찬성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했어. 그 놈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래. 우상숭배 했다고. 그게 고신이야. 참 보수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지. 부산에 신학교도 있고 그래요.
나그네 :
실제로 일제 말에 기독교계는 신사참배도 신도들에게 권장했고, 조선장로호라고 전투기도 만들어 일본에 바쳤는데요. 그 사람들은 고신이 아니었네요?
머슴 :
으응. 그 사람들은 통합기장측이 많지. 한경직 목사님도 연루됐어요. 서양 기독교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로마의 박해에 철저히 대항했던 사람들도 있고 박해에 타협했던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때 인요론 사요론이라는 얘기가 나와요. 조직신학에 나와요. 인요론은 사람이 중요하다. 사요론은 일이 중요하다. 거기서 다 반대했다면 기독교가 살아남았겠느냐 하는 것이 사요론의 입장이고 인요론은 아니다 타협한 사람들은 배제되어야 한다하는 것이고, 그런 문제가 심화되면 신학은 종교와 국가의 문제까지 파고들어요. 에구,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다시 돌아가서.......
상대에 있으며 절대를 잊어먹는 것이 죄라 할 때 다시 회복하는 것까지가 3장입니다. 그런데 그 회복하는 방법이 뭐냐? 그렇게 떨어졌으니까 힘을 들여 돌아간다는 것. 땀을 흘려 돌아가고 난관을 헤쳐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불, 칼, 그룹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절대 못 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갈 수 있다는 겁니다. 4장도 이의 연결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절대가 생명이라면 상대는 죽음이라는 얘기지요, 그런데 상대에서는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못가지요. 그리고 그 죽음은 에고의 죽음일 뿐이고요.
전도서에 보면 상대의 세계가 허무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허무하다, 허무하다 하기만 하면 어떻게 돼요? 그럼 그냥 상대에 매몰되어 사는 겁니다. 그렇죠? 그냥 상대가 전부인 줄 알고 사는 것예요. 그런데 우리가 실존이라는 것이거든요. 영원한 생명이라는 거거든요. 존재라는 거거든요. 셀프(self)라는 얘기지. ‘있다’라는 얘기고 안 없어진다는 얘기거든요. 그리고 그것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는 거지요. 서양철학에서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거쳐, 키에르케고르, 하이데커. 야스퍼스, 니체를 거쳐 실존주의 철학이 나오는 거예요. 성경도 그런 흐름과 동떨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종교에서 철학을 배제해서는 안 되고, 과학을 배제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자 4장 1절에서 표준새번역에는 ‘동침하니’라고 되어있거든요? 그런데 토라의 번역에서는 ‘알았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나는 1절이 영원한 생명을 말하고 있다고 봐요. 이 부분 ‘알았다’가 히브리말에서는 ‘야다’예요, ‘야다’는 ‘알다’예요. ‘알’은 뭐예요? ㅇ: 우주, 내가 +ㅏ: 참하늘을 + ㄹ: 여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생명예요.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카인예요. 카인의 의미는 주석에 보면 ‘얻다’ ‘생산하다’입니다. 생명을 어떻게 해서 얻는다고요? 알아서 얻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동침했다’ 동침해봐야 알지 않아요? 이게 진짜 미(美)예요. 아름다울 미(美)의 진짜 미(美)가 이거예요. 미술에서는 나체가 아름다움의 정상으로 등장합니다. 화가는 알음의 최후까지 가고서야 아름다움이 완성됨을 알고 있는 것이겠지요?
나그네 :
제가 호주에서 혼자 오래 살면서 성욕에 많이 부대꼈는데 우연히 그림 공부를 하게 되면서 무엇을 그릴까 하다가 누드에 몰두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치밀어 오르는 성욕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통제가 안 되며 그림이 그려지지 않더라고요. 선과 빛과 그림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여성의 신체에 대한 저의 생각이 눈앞을 가리더라고요. 그러나 그림을 계속 그려가면서 극복이 되더니 욕망은 물론 생각이 가라앉고 선과 음영이 제대로 보이면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때에는 진짜 여성의 나신의 곡선들의 아름다움이 나타나며 나의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앎이라는 것이 일어났는데 진정한 실제와 하나가 되었을 때의 환희와 함께 그림을 통해서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머슴 :
으음, 재밌군요........
그러니까 1절을 더 풀면 생명은 ‘야다’ 알다, 아름다울 미(美)란 말이야. 그 말을 풀었듯이, 참이 되어간다는 거예요. 더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더불어 함께’입니다. 동침, 삶을 더불어 함께 살지 않으면 어떻게 알아? 어떻게 생명을 낳아요? 이런 얘기지. 그래서 그 뒤를 이어 나오는 것이 하와가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와의 뜻이 생명인데 그 생명이 뭐라고 하나하면, 성경에는 ‘주님의 도우심으로’라고 되어있는데, 이건 많이 기독교화 된 표현이고, 토라의 히브리 표현을 봅시다;
“내가 여호와와 함께 남자를 창조하였다.”
여기서 창조했다는 말은 얻었다. 낳다와 같은 말예요. 그렇게 생명을 잇는 것이고 카인의 뜻이 ‘얻다, 생산하다’입니다. ‘내가 여호와와 함께’ 즉 원래 생명은 존재의 근원과 함께, 사람과 사람이 함께. 그게 아름다움이고 생명입니다. ‘생명이 존재의 근원과 함께 생명을 이었다.’가 되지요. 그리고 진, 선, 미가 그 안에 다 있습니다. 진과 선을 배척하고 미만 홀로 있는 것은 아닌 겁니다.
2절 : 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
그렇게 생명이 얻어짐이 카인이고 그 이후에 또 원초적으로 이어져 얻게 되는 것이 아벨입니다. 근데 아벨의 뜻이 뭐 게? 히브리말로 어원이 뭐에 가깝게? 히브리말에선 하벨인데 그 뜻이 가장 가까운 것이 ‘숨’예요. 숨. 숨은 삶이고 셀프(self)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근원예요,
2절 : .......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근데 왜 카인은 농부고 아벨은 목동예요?
4절에서 목동 것은 받았다고 했는데....... 이 부분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유대인은 유목민족이잖아요? 다분히 유목문화의 의지가 접목되어 있는 거예요. 여호와가 자기네 들 것은 받았는데 농경문화의 것은 받지 않았다는 얘기지. 농경문화는 유목문화보다 더 발달된 문화지요. 더 발달된 농경문화가 유목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농경문화에 대한 안티(anti)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죠. 그래서 당시의 유대인의 사고와 인식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 왜 아벨 것은 받고 카인 것은 안 받느냐하는 거예요. 성경에 그렇게 되어있거든. 이건 아까도 얘기 했지만, 단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은 누구 건 받고 누구 건 안 받고 그런 거 없어요. 주는 자, 받는 자 자체가 없어요. 그래서 이런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생각을 다시 짚어볼 것이, 기독교에도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에만 계시다는 것. 이건 기독교가 하나님을 독점했다는 거거든. 얼마나 웃기나! 어떻게 기독교에만 하나님이 계시나? 불교에는 하나님이 안계신가? 하나님은 근원인데. 존재인데. 우리를 존재케 하는 근원인데. 키에르케고르는 그런 관계를 관계케 하는 관계라고 표현하는데.......
카인을 숙고해보면 다분히 뭐냐. 얻어짐, 낳음의 생각이라는 거지. 생각은 생각을 계속 생산해 낸다. 카인은 얻어지는 것이고 낳는 거예요. 생산해내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에고일 수밖에 없지요. 셀프(self)는 생산이 없어요. 그냥 있음(Be)예요. 존재예요. 근데 인생의 목적은, 지구에 와서의 목적은, 그동안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했어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인생의 목적이라고요. 따라야 할 하나님의 뜻과 인생의 목적이 바로 ‘있음’예요, ‘있음’을 회복하는 것이지요. 재발견하는 것이지요. 있음(存在)은 없어진 적도 없고 없애려야 없앨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게 생명이지. 그러니까 그게 살집이야.
칠판에;
인생의 目的 ------------>存在(생명) ---->살집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다 그곳으로 되돌아갑니다.
근데 왜 왔냐 이거지. 여기에 온 의미가 있을 거 아냐? 사는 의미가! 그게 진리고 참인데, 밥되려고 왔다는 거지. 근데 카인은 밥이 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안 되었지요. 그가 유리합니다. 생각은 유리하잖아요. 방황하지요. 기도할 때도 생각은 마구 떠다닙니다. 그래서 진짜 기도는 침묵이 회복될 때 가능한 겁니다. 진짜 기도는 침묵이고 소리 없음 같아요. 그런데 침묵을 모르면 소리도 인지할 수 없어요. 마치 도화지가 없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 같이요.
밥은 맛있잖아. 살맛예요. 그건 일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거지요.
칠판에:
인생의 意味 ------------>眞理 (밥) ----->살맛
뱃사공 :
저는 조금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데요.
머슴 :
으응. 얘기해 봐요.
뱃사공 :
저는 아벨이 절대의 존재인 셀프(self)가 아니라 카인과 같은 존재로 보았습니다. 특별히 성경에 아벨이 절대의 존재라고 표현된 것도 없고, 형제로서 카인과 같이 같은 에고를 키우면서 자라왔는데, 형인 카인이 더 에고가 강하여 우월의식을 가지지 않았나. 그래서 에고와 에고의 마찰이 일어나고 카인의 자격지심이 살인의 결과까지 낳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머슴 :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건 무리가 있는 게 뭐냐 하면, 들에 나가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아벨은 한마디 말이 없습니다. 8절에서 카인이 아벨에게 “우리 들로 나가자.” 하였고 그들은 들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카인이 아벨을 쳐죽일 때까지 그들은 거기서 무얼 했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건 에고가 셀프를 향하여 치열하게 공격한 겁니다. 일방적인 공격이었겠지요. 에고의 혼자만의 치열함이었습니다. 에고는 공격성을 가지나 셀프는 공격성이 없습니다. 셀프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만 했겠지요. 그래서 셀프는 이렇다할 저항을 보이지 않고 죽임을 당합니다. 아벨이 셀프가 아니라 또 하나의 에고였다면 그것은 싸움과 전쟁으로 기술되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8절에서와 같이 아무 저항이나 말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셀프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겠지요. 에고는 항상 공격성으로 셀프를 말살하곤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이 상대의 세계에서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8절은 이런 에고의 셀프를 향한 보편적인 공격적인 행태를 내포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존재의 근원이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이건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와 똑 같은 질문입니다. ‘아벨을 어디다 두었느냐?’ 이건 ‘진짜 너를 어디다 두었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존재의 근원의 질문이기에 아벨이 또 하나의 에고였다면 그렇게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고와 에고 사이의 끝없는 전쟁과 몰락이라면 존재의 근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니까요, 아벨도 에고의 하나가 아니겠느냐하는 의문에, 그렇다면 아벨도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눈여겨 볼 것은 3절부터 7절에 이르기까지 아벨은 아무런 생각도, 말도, 입장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세월과 함께 자라나는 양 떼와 때가 되어 일어나는 셀리브레이션(celebration), 경축을 상징하는 제물과 바침이 아무런 생각의 개입 없이 일어나고 있단 겁니다. 반면, 3절부터 7절에 이르기까지에는 드러나는 카인의 생각이 그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지요.
카인과 아벨이라는 어원을 살펴보면 카인은 ‘얻다, 생산하다’이고 아벨은 ‘숨’이라고 하였죠? 무언가 계속 생산하고 얻으려고 작위와 행위를 계속하고, 생각이 없어지는 셀리브레이션(celebration)에서조차도 제물을 받느니 안 받느니 화가 나고 얼굴빛이 달라지고,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둥 생각의 생각을 계속 낳는 카인이 근본이 같은 자신의 형제인 아벨이라는 ‘숨’을 죽이는 것. 평온하고 지속적이며 깊어야 할 생명과 근원의 외연인 숨을 쳐죽인다는 것은 우리에게 일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자어 식(息)을 살펴봅시다. 이 숨쉴 식(息)자는 자기 자신(自)과 마음(心)의 조합입니다. 즉 숨은 자기 자신의 마음이란 얘깁니다. 마음은 곧 끝없이 변화하고 있는 생각이지요. 생각이 가라앉아 마음이 평온할 때 숨도 평온합니다. 생각이 미친 말처럼 뛰어 마음이 불안할 때 숨도 불안하게 쉬고 있습니다. 생각이 광란하여 마음이 극렬한 상태에서 자신이 자기의 숨을 치기도 합니다. 뭐, 쳐죽이지는 못하겠어요? 그러므로 생각의 조합, 즉 마음은 숨과 형제처럼 움직입니다. 카인과 아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생각, 카인은 우리의 숨, 아벨을 너무나 자주 치고 죽입니다. 조식(調息)한다는 것은 숨을 고르게 조절하여 마음을 고르게 한다는 것으로, 명상에서 아주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는 기법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숨을 변화하게 함과 동시에 거꾸로 숨을 조절하면 마음과 생각이 조절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옛날 사람들이 명상의 기법으로 사용한, 지금도 매우 유용한 기법이지요. 우리가 매번 모일 때마다 음악명상을 조식(調息)을 하며 시작을 하는데, 항상 이 카인과 아벨 형제가 싸우지 않고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겠습니다. 하하하.......
아벨 즉 숨은 카인 즉 생각이 그것을 미치고 죽게 하는 것이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절대에 놓여지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숨은 절대의 일부, 또는 손길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절대와 접촉하는 명상에서 하나의 중요한 문으로 이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백 :
통일교의 해석에서는요, 아벨은 묵묵히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이고요. 카인은 정말 생각도 많고 말도 많은 사람이라 정말 복종하기 힘든 인물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카인과 같은 사람은 자신을 아벨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우월의식을 만들어 사로잡혀 신앙에 충실할 수 없으므로 아벨과 같은 사람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뱃사공 :
아, 통일교에선 그렇게 말하는군요. 묘하게 교리화 했습니다. 근본을 살피기보단 복종을 이끌어내고 있군요.
복종의 여부를 떠나서 저에게 만약에 단순히 직업을 선택하라면 카인의 농부보다는 아벨의 목동을 선택하겠습니다. 농부는 한곳에 붙박혀 떠날 수 없지만 목동은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자유분방하게 다닐 수 있지 않아요? 후후후.......
물방울 :
저는 돌아다니는 것이 힘들어서 농부가 좋겠어요.
나그네 :
부인이 농부 하라는데 뱃사공님은 싫어도 농부 해야겠네. 하하하.......
하하하.......
자연 :
저는 이 생각이 떠올랐어요. 에고인 카인과 셀프인 아벨이 형제잖아요? 밀접한 관계라는 것이죠. 어떤 의미에선 에고와 셀프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둘의 관계는 서로 저주해서는 안 되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죠. 그리고 목자와 농부의 상징에서 목자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늘 새로운 곳을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이고, 농부는 한 곳에 머물러 불변하는 장소에서 반복적인 삶을 영위한다고 봅니다.
머슴 :
그렇지. 변화와 불변이라. 물론 농부가 가는 한 곳의 땅이 불변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한 곳에 붙박히는 ‘고정’ ‘고착’이라고 보았을 때 상대세계의 고정화된 관념과 절대세계의 갇힘 없는 자유로운 변화를 비교 상정해볼 수도 있겠네요.
5절 :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6절 : 주님께서 가인에게 말씁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7절 :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자, 여기서와 9절의 화두가 두 개예요.
“네가 화냄이 어찜이뇨?” 이 말을 바꾸면, “네 제물을 반기지 않았다는 것이 화가 날 일입니까?”이고, 다음에 이어서 “네 얼굴색이 바뀜이 어찜이뇨?” 이것은 “너는 느낌으로 사냐?” 이 얘기지요. 그리고 9절에서 “아벨은 어디 갔니?” 이 말은 “너의 진짜는 어디 있니?”로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에고, 인간의 생각이 실수를 일으키는데, 대표적으로 두 가지 실수를 인간이 한다는 거지요.
칠판에;
사이 틈새
생각 <----------->느낌 <--------------> (사실)일, 사건, 사람, 동물
사실인 일, 사건, 사람, 동물과 느낌 사이에서 잘못보고 있습니다. 느낌으로부터 생각을 갖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틈새와 사이에 판단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는 판단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판단하면 판단한 대로 받지, 사실과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기보다는 판단한 대로 보고 있지요. 보이는 대로 보질 못하지요. 카인은 생각합니다. ‘내 예배는 안 받네.......’ 근데 예배 안 받는 하나님이 있나? 모든 이는 하나님의 새끼라며? 그 양반 때문에 우리가 있다며? 이건 자식 안 낳아보면 몰라요. ‘내 예배는 안 받네.......’ 이건 카인이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예요. 그래서 이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자꾸 알아차리는 방법 밖에는 없어요. 그러지 않고 자꾸 생각에 끄달리고 매몰되게 되면 결국 자신의 본질을 잃고 다른 것에 의존하게 됩니다. 자신의 중심을 잃었으니 지탱을 하기 위해서 의지처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요. 원래 우리 각각의 존재 자체가 독존인데도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겁니다. 요즘 믿는다고 하는데, 무얼 믿는지, 왜 믿는지 모릅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절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 진짜 뭘 믿는 걸까요? 그들은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본질을 잃고 헛된 망상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대게 요즘 기복을 안 갖고 있는 종교가 없습니다. 복 빌어 주는 것이 요즘 종교로 취급됩니다. 요즘 농촌의 목사님들은 농가에서 기르는 소가 아파도 가서 기도해 준데요. 병나고 건강 주시라고.
하하하.......
이건 종교성이 아니지 진짜 근원에서 오는 것을 따르는 참 종교가 아니지. 단지 중심을 잃고, 근원을 잃고 엄한데다 의존하는 것이지. 붙드는 거지. 근데 왜 붙들어?
7절 후반부에;
7절 : .......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여기서 죄가 뭐야? 하나님이 얘기하는 죄가 뭐야?
하늘 :
내가 올바르게 보지 못한 일
머슴 :
그렇지. 생각으로 보는 것이 다 죄야. 판단으로 보는 것. 어제 들소리님 집에 집들이를 해서 삼사십 명 모여서 아침햇살님이 설교를 하는데 이 얘기를 하시더군요. 당신은 무조건 사랑을 할 수 있겠데요. 그런데 아직까지 싫은 놈, 좋은 놈이 있다네요. 흐흐흐. 참 그 양반 매력적이야. 솔직하잖아? 예수님은 싫은 놈, 좋은 놈이 있었을까?
나그네 :
없었을 것 같아요. 그냥 사랑 덩어린데 좋다 싫다하는 판단이 일어났을까요?
머슴 :
그럼 부처는?
나그네 :
역시 없었을 거 같아요. 좋다 싫다하는 감정이 다 공한 채 대자비만 일어나 사람들을 향했을 거 같아요.
하늘 :
아니,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러나 그게 지속되지도 않고 발전도 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분들은 가장 맑고 순수한 상태에서 보통 인간들보다 모든 감정들이 더욱 청명했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들과 동일시, 동일화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저 먼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처럼 제자리에서 명료하게 반짝이고 만 있는 감정들....... 그것들은 제자리에서 명료하게만, 그저 반짝이며 질서를 지키고 있어서 행불행을 짓지 않고 거기 그냥 있을 뿐이었겠지요.
머슴 :
그래요. 그 밤하늘의 별을 담고 있는 허공, 즉 그 별들과 별들의 사이, 그 틈새가 살아있어서 동일시나 동일화와 같은 혼잡이 일어나지 않고 질서를 지킬 수 있었겠지요. 그럼, 있지. 있었겠지. 인성이 명료하게 살아있었는데....... 내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공자는 더 노골적입니다. 논어 읽어보면 더 노골적입니다. 현실적 도덕을 강조하니까요. 그래서 유학이 윤리 도덕이 굉장히 발달 한 거예요.
있지. 상대세계에서는 없을 수가 없어요. 다만 수련을 하여 그것을 꿰뚫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죄 짓지 않기 위해서 이런 연습을 꾸준히 해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 틈새를 알아차리고 깨우쳐 살려 가는 것이 기도고, 테오리아, 참선, 명상, 묵상....... 이것들이 다 이 틈새를 벌리는 작업들입니다. 사람들이 성철이 얘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이 전에 혜능이 얘기한 것입니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 모순 된 내용의 선시를 이해하려면 이 틈새의 존재를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는 자가 존재하여 그의 생각과 판단을 통해 시각으로 들어왔던 산과 물은, 보는 자와 실제의 현존인 산과 물의 틈새, 즉 역시 현존의 눈으로 보면 다르다는 것이지요. 실제는 보는 자가 해석한 피상과 다르다는 거지요. 그리고 뒤 구절에서는 철저한 현존 속에서 현존인 산과 물은 역시 현존인 산과 물일 수밖에 없다는 동어 반복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앞에서는 아니랬다가 뒤에서는 이다 라고 하며 모순 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틈새의 시각을 드러내는 심오한 뜻이 담겨있는 선시인 거죠.
물론 산은 산이니 물은 물이니 하는 동어반복 자체는 우리가 현존, 절대, 근원, 진리를 찾는데 실제적인 도구로서는 도움이 안 됩니다. 그냥 현존에 대한 진술일 뿐입니다. 그래서 선시를 읽거나 구두선을 듣다보면 허황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지요. 잠깐 동어반복(tautology)을 설명하자면, '진리는 A다'라고 말한다면, 분명히 A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이때 A는 진리와 동의어로 사용하는 말일 뿐. 진리는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절대적 동의어라면, 즉 진리와 A 간에 모든 유사성이 100%일치하면, 이 경우에는 동어반복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는 진리다'라는 말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99.999999.......%의 근사치를 갖는 A를 발견 했다고 해도 그건 헛수고입니다. 진리에 관한 한 근사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진리이거나 진리가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이어야 합니다. 고로 '진리는 A다' 또는 'A는 진리다'라는 진술은 오류가 됩니다. 기독교에선 서슴없이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진리이신 하나님'하고 소리칩니다. 이때 진리와 하나님을 절대적인 동의어로 사용하였다면, 이 경우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진리이신 하나님'라고 하는 것은 동어반복이 되겠습니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허랑한 얘기를 지껄이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것이 기독교 교회와 목사의 말 속에서 십일조나 원하는 식으로 묘사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때는 오류가 됩니다. 근사치에도 못 미치는 A를 가져다가 진리라고 우기는 것이지요.
시 속에서 동어반복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말을 넘어선 미지나 불가지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사용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정치적인 목적에 사용된다면 그것은 선동을 위한 추잡한 소리가 아닌 다음에는 헛소리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카인이 화낸 것이 잘못이네요? 왜 잘못예요? 난 요새도 수시로 화내는데. 난 계속 잘못하고 사는 건가?....... 화낸 것이 잘못이 아니라 화를 내고 죽임으로까지 갔다는 것이 잘못한 겁니다. 그게 파멸입니다.
머슴이 칠판을 가리킨다;
파멸 <------ 화 에너지 ------->창조 ------- 일 , 직장
인생의 意味 -------------> 眞理 (밥) --->살맛
타락<------- 성 에너지 ------->사랑 ------- 가족, 가정
인생의 目的 -------------> 存在(생명) --->살집
카인은 그러고 나서도 계속해서 유리하고 방랑합니다. 마지막 16절에 놋에 가서 살았다는 데 놋의 뜻이 ‘떠돌아다님’입니다. 생각은 계속 떠돌아다니는 겁니다. 그죠? 그런데 틈새를 벌리고 알아차리고 하면 느낌이 다가왔을 때, 화가 난다거나, 애통함이 일어난다거나 할 때 이걸 시그널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걸 시그널로 삼아 동일시에 빠지지 말고 생각을 바꾸거나 통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느낌들이 에너지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것이 화 에너지와 성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개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화 에너지를 다스려서 창조로 가야하며, 성 에너지를 다스려서 사랑으로 가야한다는 거지요. 에디슨이 1+1이 1이라고 하고는 학교를 짤렸어요. 에디슨은 화가 났겠지요, 그는 하나는 더하거나 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는 전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화가 난 에디슨은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고 많은 것을 발명하게 됩니다.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발굴해 내지요. 예술가들 얘기가 남 안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합디다. 그러고 보니까 그래요. 다 있어요. 다만 남들이 못보고 안 하는 것을 발굴해 내는 것이 예술이더라고요. 백남준 선생의 비디오 아트도 그렇잖아요? TV를 그렇게 사람들의 감성을 울리는 예술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자 이런 일을 일과 직장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살맛입니다. 그러면 내가 밥이 되어 살라집니다. 내가 에너지로 타오를 수 있는 겁니다. 이게 인생의 의미라는 거지요. 그 에너지의 변이와 느낌이 인생의 의미가 됩니다. 그럼 성 에너지는 느낌으로 오나요? 이거 궁금하고 묻고 싶어요. 나는 스무 살 때 우리 기쁨님을 보면 촥하고 찌릿찌릿 오던데. 여러분 그게 느낌인가요?
나그네 :
성 에너지는 성욕이라는 얼굴을 갖기 전에도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지요. 생명작용으로서요.
머슴 :
그래요. 원초적인 에너지지요. 성이라는 느낌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있는 것 같아요. 화 에너지도 마찬가지로 화라는 것은 느낌이지요. 그러나 화라는 느낌이 일어나기 전에 그런 에너지 자체는 이미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성 에너지는 생명이고 사랑, 살앙: 삶을 함께 더불어. 이건 4장 1절에서 ‘더불어 함께’. 이게 아름다움이거든. 그리고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은 가정, 가족이란 말이지요. 봐요. 이 길을 통해서 생명을 이어가잖아. 생명 말고도 생각 같은 것은 사람들이 모인 시민단체를 통해서도 이어가지요. 엔지오로, 공동체로. 이렇게 함께 더불어 하면 이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죽음이 되는 겁니다. 카인이 죽는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죽일 거라 하지요.
14절 :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15절 :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근원인 하나님이 말씀하시지요. 절대 죽는 것은 없다. 떠돌아 다녀도 다 이어지게 되어있다.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다 생명이고, 사랑이고, 죽음 없음이다. 입니다. 멋있지요? 하나 더 복습 겸 결론을 얻으면, 생각은, 에고는 죽음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어요. 근데 셀프는 영원히 이어집니다. 생각은 죽고 살아나고 죽고 살아나고를 반복합니다. 그렇죠? 여러분들의 의식(意識)은 나타나고 사라지고를 계속합니다. 에고는 그런 겁니다. 그러나 본질은 면면히 이어갑니다. 기름을 부으면 마치 하나의 완벽한 막대기처럼 이어집니다. 본질이 깨어나 의식이 이처럼 기름을 붓는 것처럼 단속 없이 면면히 이어질 때 이를 기름부운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깨달은 자에게 일어나는 축복과 같은 의식의 완성된 완벽한 흐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대가리에 기름 갖다 부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카인을 떠돌아다니게 할망정 죽지는 않게 합니다.
하별 :
동생을 죽이고 후회하거나 잘못을 빌지도 않고 땅을 치고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너무 쉽게 용서를 받고 있네요?
머슴 :
그러니까 살인이라는 범죄와 그에 대한 심판의 얘기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리고 여기서 에고는 후회나 잘못보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두려움 자체가 갚음이고 통회입니다. 14절에 보면, 쉬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두려워합니다. 근데 사람을 죽이면 생명을 앗는 것인데 과연 그 기분이 어떨까? 깨어나기 수련을 하고나면 개미도 못 밟을 만큼 민감해지던데....... 한 일년간은 못 밟겠던데?....... 뭐 요즘은 죽여. 네가 여기 들어오면 안 되지. 하면서. 후후후.......
민들레 :
누군가를 미워하면 찝찝한 게 계속 남잖아요? 굳이 해를 끼치지 않아도요.
머슴 :
그게 죄라는 거야. ‘얼굴빛이 달라짐이 어찜이뇨?’ 라고 하잖아요?
나그네 :
양심의 가책이라는 거지요.
머슴 :
그렇지. 양심이라는 말 자체가 영이니 얼이니 하는 것과 똑같은 거야. 양심이라는 말은 유학에서 나온 말이거든. 특히 왕양명 선생이 강조해요. 그때 왕양명 선생이 강조하는 양심은 예수쟁이들 말로 하면 영이야. 영. 얼. 양심의 가책은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이 되고. 그것이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면, 5, 6, 7절에서 나오는 얼굴이야. 얼의 울타리 얼굴. 그래서 얼굴에 금방 나타나는 사람들은 순수한 사람들이야.
기쁨 :
머리형들이 그걸 잘 감추는데.
나그네 :
전 머리형이지만 잘 못 감추는데요? 음흉하게 포커페이스를 잘 하는 사람들은 훈련을 거쳐서 그리되는 겁니다.
머슴 :
사람들의 근원은 똑 같아요. 훈련과 환경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안 변하는 것이 있지요. 그게 셀프입니다.
나그네 :
그러니까 남을 속이기 위한 특별한 에고를 만들어 훈련해서 갖고 있어야 남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는 거지요.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그런 강력한 에고 때문에 솔직해 지고 싶어질 때 도리어 어려움을 겪어요. 자신이 만든 에고의 함정에 빠져버린 것이지요. 제 발등 찍는 게 되나?
머슴 :
그렇지.
민들레 :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라도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나그네 :
웬걸요. 눈동자도 훈련할 수 있어요. 자신하지 마십시오,
민들레 :
그러나 수련한 사람들은 결국 진실은 알아내고 만다고 봐요.
머슴 :
자, 자, 마지막으로, 카인이 왜 아벨을 죽여요? 이거 하나 던지고 끝냅시다.
민들레 :
두려워서요.
머슴 :
왜 두려웠을까?
뱃사공 :
두려움보다는 분노로 죽인 것 같아요.
머슴 :
분노는 왜 일으켰어요?
자연 :
분노를 파고 들어가면 두려움이잖아요?
머슴 :
그럼. 그럼........ 분노는 두려움과 수치심 그리고 의심의 발로예요. 믿지 못하는 거예요. 아벨이 누군데? 나! 성경에는 동생이래. 유전인자도 무지 흡사한.......
믿음이라....... 선생님들이 제자 픽업할 때 의심하는 사람은 안 뽑아요. 구르지예프는 제자들에게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고는, 물 속에 완전히 잠겨서 생명이 위태로워져도 계속 걸어 들어가는 사람을 제자로 뽑았데요. 그야말로 ‘죽으라면 죽겠어요.’였데요. 그런 믿음의 대표성을 보여주는 사람이 예수입니다. 죽으라니 죽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되었어요.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되었잖아요? 부처와 공자는 자연사 하십니다. 노자는 그 최후를 보여주지 않아요. 그러니 죽는 모습으로는 예수가 가장 극적입니다. 눈물이 쏙 빠지게 만들어 주십니다. 김흥호 선생님이 오늘 이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리스도란 선생이다.’ 그래서 인생의 의미의 하나는 선생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세 분의 선생님을 만났데요. 당신이 일본 유학을 가기 전에 만난 첫 번째 선생님이 누구였느냐 하면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이었데요. 근데 그 목사님은 무지무지 열정적이고 감성적이었데요. 그리고 일본에 가서 만난 선생님이 우찌무라 간조였데요. 이 분은 성경을 풀이를 했는데, 풀이한 책이 50권이래. 그래서 그 원고지가 당신 키보다 높이 쌓였데. 그러니까 지적으로, 머리로 다가온 선생님이었다는 거지. 그 다음에 해방되어서 귀국해서 선생님을 찾다 보니까 다석 유영모 선생님이 계시더래. 갔더니 이 양반은 의지로 사는 분이더래. 그 분의 제자가 되려면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일일일식을 해야 했데요. 그리고 그 분 앞에서는 항상 무릎을 꿇고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고 앉아 강의를 들어야 했데요. 요즘에 김흥호 선생님은 일식을 하시는데 당시에는 그걸 못해서 병도 나고 그러셨대요. 그렇게 세 분의 선생님을 만났는데 기가 막히게도 지, 정, 의 - 머리, 가슴, 배의 밸런스를 갖추게 되었더랍니다. 다 가르쳐주시더랍니다. 이 얘기를 하시며 결론 내리시는 것이 ‘행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짜 지식, 지혜가 아니다.’ 이었습니다. 그 행동의 근간이 되는 것이 믿음이겠지요? 구르지예프의 제자의 믿음, 김흥호 선생님이 제자였을 때 서로 다른 선생님에게 일어났던 믿음을 한번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대로 믿음이 없어 의심에 못 이겨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분노에 휩싸여 ‘나’를 죽이는 카인과, 믿음이 약하여 의심하며 물에서 나와 버리는 구르지예프의 탈락한 제자, 그리고 서로 다른 선생들을 보고 의심을 품었다면 지금의 김흥호 선생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지를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기까지 합시다. 자, 하늘님부터 마음나누기를 하십니다.
하늘 :
순간순간 여러 생각들이 지나갔는데, 그중에서 카인은 끝까지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가 남만 죽일 수 있다고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것이 자신의 생각뿐이라는 것을 끝내 모르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있었고요.
머슴 :
거저 얻어서 그런가봐. 그렇지?
하늘 :
네, 호호호. 그리고 사랑 에너지에는 화가 없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그 상태에서도 제게 화가 있구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머슴 :
그게 생각입니까, 사실입니까?
하늘 :
사실입니다. 그걸 어떤 때에 발견했느냐 하면, 학교에서 행사를 하거나 모두를 위해서 뭔가 필요할 때 발의를 하거든요. 그때마다 주위에서 그거 해서 뭐하냐는 식의 부정적인 얘기가 많이 나와요. 있는 것을 또 만들려고 한다는 식의 반응들이 나오는데, 그때 저의 반응에 화가 있는 거 같아요. 그로 인해서 더 멋진 행사를 만들게 되고, 아이들을 위해서 더 잘하게 되고, 더 꼼꼼하게 프로그램 계획하고. 그럴 때 느끼는 것이 기쁨, 즐거움, 그리고 살맛. 이런 것들을 직장에서 많이 느끼는데 내가 화 에너지를 올바르게 창조를 향해 잘 사용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나그네 :
창조 쪽으로 잘 가시고 계시네요.
하늘 :
예, 제가 늘 그러는 것 같아요.
나그네 :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제대로 살고 계신 걸 놓치지 않고 잘 보고 계시네요.
하늘 :
네, 저는 정말 잘 살고 있어요. 호호호.......
나그네 :
그걸 발견하고 계신 것이 행복이잖아요. 그죠?
머슴 :
그럼! 그렇지. 왜 우리가 계속해서 생각, 느낌 알아차리고 관상, 묵상을 하느냐 말이야.
나그네 :
실제로 생각과 느낌을 알아차릴수록 생각보다 더 많이 제대로 살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실제보다 더 못하게 살고 있다고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식의 학습을 받아왔기 때문에 불필요한 죄의식을 많이 갖고 산다는 것이지요. 정말 불필요하게 불행을 사서 안고 있다는 것이 발견될 때가 많습니다.
머슴 :
지금 나그네님이 죄의식 얘기를 해서 말인데, 계속해서 죄의식을 느끼며 살면 나를 발견할 수 없어요. 내가 누군지 모른다니까. 진정한 종교성에는 죄의식이 있지 않아요. 근데 돈을 벌기 위한 종교는 자꾸 죄의식을 부추겨야지. 그거 해야 무섭고 두려워서 의지를 하게 만들고 그 대가로 돈을 뜯을 수 있으니까....... 두려움과 의심과 수치심에서 비롯된 영성은 거짓이야. 기복신앙이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너는 부족하다. 너는 필요한 게 많다. 너는 불완전하다. 이런 거지요. 내가 지난주에 누구누구 이름까지 대며 말한 인간들이 바로 그런 장사치들이야. 그런데 기쁨님이 당신도 어떤 의미에선 그런 사람들처럼 영성을 팔아먹는 사람이 아니냐고 해서 앞으론 이름 대는 것은 앞으로 삼가겠고, 한 목사 얘기를 해주께. 얼마나 골때리는지 알아?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입으로 말하면 다 구원 받았다는 거요. 근데 성과급이 있데. 열심히 헌신하고 교회 일에 봉사하면 하늘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 예수님이 보이는 좋은 자리에 앉고, 입으로만 믿고 헐렁헐렁 교회 다니면 안 보이는 저 끝자리에 가게 된데.
나그네 :
혹시 헌금 많이 하면 좋은 자리가고 조금 내면 나쁜 자리 간다고 하지 않는가요?
하하하.......
머슴 :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천국이 그런 곳이라면 난 안 가겠어. 거길 왜가? 참, 네....... 거긴 교회도 아냐!
민들레 :
전에는 그러며 교회 다녔어요. 봉사 꼭 해야 되는 거고, 십분의 일을 꼭 바쳐야 하고, 참석 안 하면 죄를 지은 것 같아서 일주일을 불안하게 살아야 되는 거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머슴 :
그게 잘못된 인포메이션을 그대로 받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밟아서 그게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어요. 그렇게 자꾸 깨어나서 자유를 향해 가는 거지. 원래의 자리로 말예요.
하늘 :
아까 음악 ‘자유’를 정말 오랜만에 들었는데, 아, 내 영혼이 자유롭구나 하는 것과 춤추고 있구나 하는 것과 세포 하나하나가 바람을 맞는 것처럼 시원하게 열리는 것을 만끽했습니다. 아,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멘.
기쁨 :
옆에서 하늘님을 뵈면 업그레이드되시고 말씀하실 때 그런 기운을 느껴서 기쁩니다. 창세기를 하면서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이 어떻게 풀어질까하는 것이 굉장히 고민되었었는데 기대이상의 행복한 풀이가 되어서 저도 행복하고요.
저는 깨어나기에서도 생각, 느낌을 나누기가 참 힘들었었어요. 제가 느낌을 잘 모르고 살았더라고요. 굉장히 단어도 한정적으로 알고 있었고요. 근데 여기서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물었을 때 카인이 모릅니다. 라고 얘기 한 것이 나도 나를 몰라줬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어 오늘도 내 얘기가 있구나하는 것을 느끼고 기뻤습니다. 아멘.
머슴 :
한 술 더 뜨시네요. 좋은 걸 짚어주셨어요. ‘내가 아벨 지키는 사람예요?’....... 그럼 자기가 자길 안 지키고 누굴 지키나?
나그네 :
그러니까 카인은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고, 생각은 그런 것도 모른다는 얘기지요.
머슴 :
그렇지.
민들레 :
카인이 생각에서 생각으로 자꾸 들어가다 보니까 죽임까지 가잖아요. 요즘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생겼거든요. 제가 원래 사람들을 잘 이해하는 편예요. 그 사람 입장에서 잘 생각을 해요. 그런데 유독 그게 안 되고 한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에 대해 요새 자꾸 찾고, 찾고, 찾는 중이고 쓰고, 쓰고, 쓰는 중인데 원인이 안 밝혀지는 부분이 있어요. 그건 그 원인이 내 안에 있다는 거잖아요? 내가 계속 이러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닌가. 이건 생각천사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생각악마가 들어 온 것이잖아요? 그래서 오늘도 이 말씀 들으면서 아, 그래 나를 바꿔봐야지. 내가 정말 행복한 길을 선택해야지. 그 사람의 이쁜 모습을 보려고 애써야지.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나를 죽여서는 안 돼지 하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정말 한번도 이번처럼 사람을 미워해 본적이 없어서 정말 모르겠으면서, 내가 사람을 이렇게까지 미워할 수 있구나하는 것에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머슴 : 정말 그동안의 민들레님답지 않네?
민들레 :
그러게요.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구나 하니까 두렵기도 하고, 이 모습이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감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면 기분 더럽기도 하고요. 비워도 다시 들어오고 하니 황당하기도 합니다. 카인과 아벨 얘기에서 생각이 계속돼서 죽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
나그네 :
14절 마지막 부분에 카인이 얘기하기를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첫 인류이고 아벨이 죽고 아담과 하와의 유일한 자식이 카인인데 여기서 카인이 말하는 ‘저를 만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이 부분이 또 기독교 안티들이 꼬집는 부분입니다. 아담과 하와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는 얘기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부분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첫 인류라는 것이 오류가 되고 만다는 겁니다.
하늘 :
호호호....... 제가 초등학교 때 궁금해 하던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머슴 :
하나님이 우리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합니다. 우리라고 표현할 때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고 했지요? 지금 개인의 에고와 셀프를 다루면서 투쟁과 공격으로 셀프를 말살하기까지 하고 떠돌아다니며 쉬지도 못하고 공포에 절어있는 에고가 외부나 타인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할 거라는 고뇌에 빠져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봐야하지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이라는 그 사람들도 각자 다 카인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지요. 누구나 다 카인을 갖고 있다고 봐야지요. 그래서 죽임까지 치달은 에고가 거기서도 멈추지 않고 생각의 연속이 멈추지 않아 다른 에고가 그 에고를 죽이거나 그 에고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공포에 젖는다면 근원은 1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고의 확장은 그 개인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경전은 계시되어 있고 감추어져 있으니까 그 메타포를 봐야하는 겁니다. 써있는 대로 본다면 뭐 그게 소설책인가? 하물며 소설책에도 그 안에 메시지가 있다. 하물며 경전인데.
나그네 :
사람들이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즉 우리가 자신들 속에 카인과 아벨이 있어서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개연성을 돌아보지 못한 채, 그리고 자신 안에서 에고의 소음과 같은 목소리들과 셀프의 침묵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조화를 해야 하는 것을 모른 채 서로 모두들 외부의 에고를 향해 공격성을 들어낸다는 얘기가 되겠네요. 그리고 이렇게 계속되는 에고의 확장은 하나라도 해결되기는커녕 고통의 대가를 증폭할 것이다. 그것이 일곱 갑절의 벌이라는 얘기네요.
머슴 :
그렇지. 그렇게 봐야지. 반면에 전통적 해석은 뭐냐. 하나님 따로, 우리 따로, 사람 따로 이렇게 따로따로 봤단 말이지. 그러니 해석이 딱 맞아 떨어지질 못했지. 그러나 이제는 아침햇살님을 기점으로 에고와 셀프로 객관화 하면서 보아 현대에 맞는 해석의 단초가 제시되면서 메타포가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젠 과거의 전통 기독교 해석과 다 틀려졌어요.
그리고 성경에서 일곱 배, 일곱 배로 늘어난다는 것은 무한대로 늘어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국 :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사람이 기대가 있어서 그 기대에 부합되지 않으면 미움이 일어나서 죽임까지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동생 내외가 어머니 몰래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요즘 커플아트라고 교회의 프로그램을 다녀온 후 더욱 사이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네에 갔다가 이곳으로 출발을 하는데 올케가 제가 배가 고플까봐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어요. 전에 제가 올케에 대하여 지나치게 기대가 커서 참 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흡족하지 않았었는데, 점점 하는 모습에서 저를 향하여 진솔하게 우러나오는 것이 피부에 와 닿으니까 저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데서 과잉된 기대를 접을 수 있어서 일어났던 미움이 사랑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난주에 인도 다녀오신 머슴님하고 기쁨님 얘기를 들었잖아요?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실험정신이 발동하여 일주일동안 카레를 해먹었어요. 호호호.......
하하하.......
너무 먹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카레를 먹었는데 그 뜨거운 카레를 어떻게 손으로 먹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머슴 :
인도에서는 카레가 뜨겁지 않아요. 지금 우리가 한국에서 먹는 카레는 일본식예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개량한 것이지요. 그 향도 인도 것과는 달라요. 일본인들이 그런 것을 잘해요. 샤부샤부나 라면이 일본음식으로 알고 있는데 다 중국음식예요. 특히 샤부샤부는 원조가 몽고예요.
그런데 시누이하고 올케 사이가 너무 좋으면 시어머니가 시샘하지 않나?
수국 :
그런 면이 있어서 저희들이 어머니 계실 때는 자제해요.
하하하.......
머슴 :
동기간에 사이가 좋아서 참 좋다. 수국님은 동생 내외를 하비람에 보냈잖아? 난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냈는데 아직 우리 형제들은 하나도 못 보냈어요. 동기간을 보낸다는 것이 내겐 가장 힘든 일인데.......
두잉 :
한 두 달간 예상치 못했던 일을 받아가지고 참석하질 못했어요. 지금 건대에 민들레 영토를 개점을 했어요. 인테리어 다 끝나고, 프로그램도 준비되고, 종업원들도 다 배치되었습니다. 그래서 2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오픈 되었습니다. 평일에는 학교를 나가고 주말에 프로그램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저녁 시간에 제 시간을 배치할 수 있어서 이렇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휴먼 쎄라피라고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중에도 학생위주의 새로운 교육프로그램을 같이 만들어가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와서 집에 온 것 같고요. 사람들이 많아서 반갑고요. 새로운 분들도 오셔서 신기하고....... 느끼는 게 뭐냐 하면, 숨과 쉼이 차이도 있으면서 의미가 상당히 비슷하다. 내가 쉬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구나 숨을 쉬기 위해서 쉬어야겠구나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배를 참석할 때마다 풍성하게 얻는 것이 있거든요. 일주일에 한번은 이런 쉼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동안 일하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홈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또 새로워지고, 설레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아멘.
생기 :
의심을 해서 사람을 잃은 느낌이 듭니다. 의심, 의존은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고, 두려움은 내 자신이 홀로 온전하다는 것을 몰라서 오는 것이고....... 내면이 가난해서 그렇게 하다보니 좋은 사람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보니 슬픈 느낌이 많이 다가옵니다. 사람, 일 , 사건들을 잘 못 보는 것 같아요. 그걸 보는 나의 내면도 약하고, 그러니까 잘못 판단하고 그래서 아픔이 올 것 같은데 그 느낌을 달 달래서 잘 보아 또 잘못을 반복하지 말고 살아야겠습니다. 아멘
머슴 :
잘 보는 수련을 하세요. 잘 보는 수련은 아침에 일어나서 30분 동안 집에 있는 불특정한 아무거나 5분에서 10분씩 말없이 바라보세요. 30분 씩 40일만 해보세요. 생각 느낌이 지나가면 생각, 느낌을 알아차리며 그냥 보세요. 아마 일주일만 해도 확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30분 동안 서너 개의 물체를 5분에서 10분씩 바라보면 됩니다.
생기 :
네, 그러겠습니다.
하별 :
잘 보고, 그리고 오는 느낌을 풍부하게 하려고 애쓰렵니다. 아멘.
뱃사공 :
오늘 성경 이야기에서 카인이 물음을 안 했구나하고 느꼈습니다. 카인이 한번만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왜 안 물어봤을까하는 생각이 났고요. 저는 물음을 가지고 항시 살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 아멘.
머슴 :
다시 한번 짚어보면 카인의 의미는 얻다, 낳다, 생산하다이고, 아벨은 숨결, 숨, 입김이라고 번역됩니다. 그리고 나는 카인을 에고로, 아벨을 셀프로 보고 있는 거예요.
물방울 :
동면이 너무 길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깨고 나가서 활동을 해야 하지 않나하는 마음이 내내 올라옵니다. 아멘.
소리 :
많이 오고 싶었던 장소를 이제야 왔어요. 때가 됐구나 싶었지요. 한참 헤매다가 잘 찾아와서 너무 기쁘고요. 예배시간을 통해서 계속 가슴이 뛰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카인과 아벨의 삶을 보면서 그게 뭔지 모르게 뭘까, 뭘까 하는 의문 중에, 지금부터 일주일 전에 이십오 년 전에 만난 사람의 상황을 들었을 때 그 들었던 상황만 들으면 될 것을 그 사람이 어떻게 살겠구나, 어떻게 하겠구나 하고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어, 밥을 먹으면서도 그 한 사람 생각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아, 이거구나. 그동안 나를 자유스럽지 못하게 했던 것이 바로 이거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너 잘 만났다. 이것이 내가 계속 수련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라고 느끼며 오늘 확연히 짚어졌습니다.
너무 반갑고, 여백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람스 홈에 예배를 글로 정리해서 올렸던 것을 보고 가슴에 은혜를 느꼈는데, 하비람 홈에서 여백님이 서울, 경인지역 모여야 하지 않겠느냐하셨어요. 그래서 불현듯 움직이게 된 것이죠. 일주일에 한번씩 이렇게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데 제가 상계동에 살아서 접촉이 안 되다가 에니어그램을 하면서 접촉이 되기 시작했고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머슴 :
종종 오십시오. 하하하.......
짝짝짝.......
지혜 :
깨어나기 후에 람스에 오고 싶어 하다가 잊어버렸는데 이번에 54기 살아가기를 하며 여백님께 같이 가자는 얘기 듣고 이렇게 오늘 처음 오게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 예배 끝나고 왔더니 오늘 늦게 왔습니다. 다음에는 좀 빨리 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면 2시까지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 오면서 느낀 것이 어떤 공간일까 하는 궁금함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을까하는 궁금함이었습니다. 가장 오고 싶었던 이유가 나눔이 수련이 끝나고는 일상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잖아요. 그리고 주일에는 다니던 교회를 안나가기도 어렵고 했는데, 교회도 나가고 람스에도 올 수 있도록 시도해 본거죠. 오늘 말씀을 들으며 와 닿았고, 영적으로 같이 격앙이 되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 이렇게 온 것입니다. 아까 말씀 중에 카인과 아벨을 들으면서....... 저는 누구를 미워하지 않거든요. 금방 잊어버리고, 덮어주기를 잘해요. 좋은 것으로 받아드리고 저도 살면서 많이 화를 창조에너지로 승화시키면서 살았는데, 아들하고 부딪치면서 아들이 너무 미운 거예요. 그래서 신년 테오리아도 그래서 갔다 온 것인데, 그래도 해결이 잘 안됐어요. 그런데 이번에 살아가기 다녀오고 나서는 아들이 점점 예뻐 보였어요. 아들은 제가 일주일에도 서너 번씩 안마를 해서 재우곤 하는데도 저의 스킨 쉽을 매정하게 잘 뿌리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저를 밀어내고 접촉을 싫어하던 아이가 제게 머리를 잠깐 기대고 일어나더라고요. 너무 기뻤습니다. 아들을 미워할 때는 너무 괴로워서 몸이 일주일 간이나 아프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미움이 점점 사라지고 사랑이 다시 찾아오는 것을 봅니다.
질문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테오리아를 다녀와서 모닝 페이퍼를 계속 써왔거든요. 그런데 삼사일 전부터 쓸 말이 없어지는 거예요. 생각이 단순화돼서 그러는지, 열망이 그쳐서 그러는지, 두세 장씩을 썼던 것이 삼일 째 한 페이지를 못 쓰겠어요. 왜 그러는지 좀 여쭤볼게요.
머슴 :
잘 가고 계시구먼. 나는 어떤 날은요. 한 자를 못 써요. 그 못 쓰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냥 넘어가세요. 그런 순간이 있어요. 그 넘어가게 하는 순간과 같이 하세요. 사실 그 순간 속에 엄청 아름다운 것이 있어요. 뭔가 쓰려고 하는 데 머리 속이나 가슴속, 배속이 텅 빈 것을 보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그때 그 텅 빔으로부터 무엇을 써야하나 하는 불가항력에 가까운 고민을 하기 보다는 그 순간의 침묵을 포착하여 즐기게 되는 것이 바람직한 겁니다. 어느 날은 두 페이지씩 막 쓰다가 오늘 아침엔 다섯 줄 썼네. ‘아침을 맞는다. 지나가버린 것은 없다. 지금만 있을 뿐. 기억으로부터 자유에 갔으면. 고요함과 침묵으로부터 시작, 그리고 공허, 적멸.’ 딱 이렇게 써놓았어요.
지혜 :
오늘은 ‘오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써 놓고는 할 말이 없는 거예요.
머슴 :
그럼 거기까지. 거기까지야.
지혜 :
근데 일부러 막.......
머슴 :
아니. 아니. 일부러 왜 해? 그러지 마세요. 다양하게 주셔요. 다양하게 주시는 걸 알아차리면 돼요. 한자도 못쓰고 날짜만 써 놓고는 넘어가는 날도 있어요. 근데 좀 지나면 그때 그것이 얼마나 은혜인지 몰라요. 잘 안 써진다는 것이 다가오다니 잘 하고 계시구먼요.
지혜 :
네....... 네.
하별 :
부럽습니다.
머슴 :
하하하....... ‘부럽습니다.’ 소리까지 나오네.
하하하.......
여백 :
육 개월 만에 왔습니다. 감개무량하고요. 어짜피 우리 삶이 카인과 아벨의 통합이라면 정말 숨 잘 쉬고 생산 잘 하면서 살겠습니다. 아멘.
기쁨 :
귀환하셨는데 박수 한번 쳐드립시다.
짝짝짝.......
머슴 :
세부갔다 오더니 더 도사가 되어서 왔어. 허허허.......
민들레 :
정말 다녀오더니 더욱 깊어졌어요. 그 깊어짐이 나와요.
여백 :
그래요? 성공했네요. 허허허.......
하하하.......
자연 :
제가 옆에서 기를 팍팍 받고 있습니다. 전도부장님이 컴백하시면서 살아가기에서 만나신 소리님과 지혜님이 오신 것이 너무 반갑습니다. 행복합니다.
어제 TV 프로그램을 보는데 거기 나오는 부부의 모습에서 아내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러니까 그 화장을 해서나 그런 게 아니라. 그 표정 자체가 살아있으면서 사랑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어요.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근데 지금 마음나누기를 하는 우리 람스 도반들의 얼굴에서 그 얼굴이 보이는 거예요. 너무 아름답습니다.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아멘.
머슴 :
광고 하겠습니다. 하별님이 카페에도 올려주셨는데, 3월 12일 오후 7시에 여의도 라이프 오피스텔에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탄신 117주년 행사가 있어요. 거기서 유영모 선생님의 사상, 그 다음에 함석헌 선생과 김흥호 선생의 사상까지 감리교 신학대학의 교수로 있는 이정배 선생이 강연회를 합니다. 참고로 이정배 선생은 저하고 불알친구 입니다. 중,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습니다. 그 친구는 중, 고등학교 때부터 될 성 싶은 나무여서 종교부장을 놓친 적이 없습니다. 반면에 저는 훼방꾼이었습니다. 후후후....... 저는 그와 친구지만 그 양반 앞에 가면 머리를 조아립니다. 정말 훌륭한 신학자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가시면 세분의 사상을 정말 귀에 쏙 들어오게 설명해 줄 겁니다. 특히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사상을 이정배 선생은 ‘성령 그리스도론’ 을 전파하신 분으로 해석해요. ‘성령 그리스도론’이라는 것은 예수만 그리스도가 아니다. 오시는 성령은 다 그리스도다. 라는 겁니다. 저도 그 사상을 따르는 사람예요. 예수만 그리스도면 우리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내 안에 이미 그리스도성이 있습니다. 그걸 처음으로 주장했던 분이 바로 다석 류영모 선생입니다. 그걸 이정배 선생이 학문으로 풀었는데 그 제목을 ‘성령 그리스도론’이라 하였습니다. 제가 꼭 가야하는데 그날 오후에 L.A행 비행기를 탑니다. 제가 좀 오래 L.A에 머무릅니다. 그래서 11일 예배까지는 제가 하고 그 후 두 주를 여러분들이 프로그램 만드셔서 지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딸 내마음이 미국에서 졸업연주회를 갖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쁨님과 가서 도와 줄 일도 있고, 우리 부모님이 L.A 사시는데 가서 뵙고 집안일도 돌보고 두 주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또 광고가 있나요?
하늘 :
4월 1일에 과천으로 산행예배를 가고요. 5월 11일 오후에 여기서 모여서 해남으로 출발합니다. 카페의 안내를 참고하십시오,
머슴 :
해남 설아다원에 가서는 우리가 직접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드는 수련도 할 거예요. 자, 더 광고가 없으시면 그리스도의 기도 세 번으로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 완전 충만 일체 은혜 감사. 그리스도 완전 충만 일체 은혜 감사. 그리스도 완전 충만 일체 은혜 감사. 아멘.
나그네가 쓴 동화가 종합문예지에 당선 되어 나그네는 람스 도반들에게 나눠 주려고 그 잡지들을 여러 권 가져왔다. 모두들 한 권씩 집어 나그네에게 사인을 부탁했고, 나그네는 행복해 하며 사인을 해 주었다. 사람들은 자리를 다시 정리하고 몇몇은 주방에서 먹거리를 내오고 있었다. 항상 즐기는 빵과 음료가 펼쳐졌는데, 오늘은 여백이 자기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베지밀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활발하게 나눈다. 반가움이 휘몰아 도는 회오리바람처럼 분주하게 정을 나누는 사람들을 휩싸고 있다. 빵과 음료가 자리에 정돈되자 사람들은 음식 주의에 둘러앉았다. 어느 정도 접시가 비워져 갈 때쯤 뱃사공이 기타를 잡아 연주를 시작하였고 모두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가슴에는 행복감이 차오르고 포근하게 사람들을 사로잡는 복음성가가 람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9. 동반하는 상대세계와 절대세계
2007년 3월 11일 일요일 맑으나 춥다. 바람이 불고 있다.
람스에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노래하듯 부끄러운 수면을 찰랑이는 잔잔한 음악이 모두의 곁을 채우며 흐르고 있다. 주방에선 보통 때와는 달리 분주한 모습들이 보인다. 하얗고 갸름한 흰 떡들과 오뎅꼬치들, 그리고 삶은 계란들이 수북이 쌓인 것이 보인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수국이 약속한 대로 떡볶이와 오뎅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의 여행을 위하여 사람마다 잔을 들고 주방에 들어와 커피나 녹차를 담아 간다. 음식 재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주방에 들어와 그걸 보고 가는 사람들이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눈빛이 마주치면 잔잔한 음악이 다치기라도 한다는 듯 말소리를 죽여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서둘러 홀에 둥그렇게 배치된 자리들에서 한 자리씩을 찾아 앉는다. 모두 자리에 앉고 음악은 더욱 깊어 가자, 새벽의 어스름한 여명이나 저녁의 아스라한 황혼 속에 드러나는 연못가를 빙 둘러 안치된 불상들의 군상처럼 좌정한 모습들이 서로를 가까이서 이웃하고 멀리서 마주하고 있다. 머슴과 그의 아내 기쁨, 하늘, 수국, 진이, 자연, 나그네, 뱃사공과 물방울 부부, 바그완, 강물, 민들레, 또 하나의 기쁨, 순둥이, 여백, 하별, 지혜, 생기가 모였다.
맑은 공 소리가 세 번 울린다. 머슴이 책을 들고 일주일의 묵상 중에 발견한 책 속의 깨어있는 구절들을 읽어준다;
사람이란 한 몸에 각 부품과 같아서 동일한 근원에서 창조되었다. 한 부분이 다쳐서 아파할 때 다른 부분이 평화롭고 조용하게 지낼 수는 없다. 타인의 불행에 당신이 무관심하고 아무런 슬픔도 느낄 수 없다면 당신은 인간이라 불릴 수 없다.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사람마다 자기 그릇이 있고 몫이 있다. 그 그릇에 그 몫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안으로 살펴야 한다. 내가 지금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일이 인간의 삶인가. 지금 나답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 스스로 물으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내 삶을 만들어 주는가. 내가 내 삶을 만들어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저마다 자기 그림자를 거느리고 휘적휘적 지평선 위를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소나무가 소나무를 떠나 나무로 돌아가면 곁에 있는 참나무와 한 몸이 된다. 나무가 나무를 떠나 물건으로 돌아가면 아래 있는 바위와 한 몸이 된다. 내가 나를 떠나 사람으로 돌아가면 멀리 있는 너와 한 몸이 된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 물건으로 돌아가면 걸터앉은 바위와 한 몸이 된다. 아하, 한 물건으로 돌아가면 사방천지 탁 트여 거칠 것이 없겠구나. 어떤 이는 본래 무일물이라 처음부터 한 물건도 없다고 했지만 지금 내 형편으로는 너무 먼 이야기이다. 시방은 아무쪼록 나를 떠나 사람으로 돌아가기. 사람도 떠나 물건으로 돌아가기. 마침내 나를 떠나 나없는 나로 돌아가기.
다시 음악이 흐른다. 랩퍼가 랩으로 시작을 열며 전자음악의 비트가 살아있는 채 흐르기 시작한다. 음악의 비트가 점점 더 강해진다. 움직임을 허용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앉은 채 상체를 춤 속에 던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들이 즐겁고 아름답다. 음악을 온 몸으로 흡수 하고 있는 흡족한 모습들이었다.
바그완이 오늘의 기도를 리드한다. 그는 노래 기도를 선택하였다. 동요였다. 조금도 치장하지 않은 생생한 목소리로 바그완은 일 절을 부른다. 동요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절을 같이 부르자고 한다. 멋진 단체기도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곳에서
파란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곳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아멘.......
다시 신비한 전자음과 둔중한 북소리가 함께 울리기 시작하더니 전자 기타의 강렬한 비트와 드럼의 경쾌한 리듬으로 이어지며 국악의 피리 소리가 돌출한다. 사람들의 몸짓이 격해지기 시작한다. 음악을 마음껏 환영하고 있었다. 곁에 있는 도반의 숨소리가 격랑을 실은 것 같다. 귀에서는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퍼져나가는 열정이 이웃의 도반을 얼싸안고 있다. 또 다시 님들의 미소를 본다.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어주면서도 언제나 새롭게 사람을 맞아준다. 음악이 웅장한 북소리로 마무리를 급하게 끝낸다. 몇몇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람스에 불이 환하게 켜진다. 명상이 끝나는 것에 맞추어 뱃사공이 일어나서 불을 켠 것이었다.
머슴 :
시방 느낌은?
수국 :
재밌었습니다.
머슴 :
왜 재밌었습니까?
수국 :
신 났어요.
진이 :
즐거워요.
물방울 :
춤추고 싶었어요.
머슴 :
안 추던데 뭐....... 남편인 뱃사공 아우님은 좀 흔들던데.
하하하.......
뱃사공 :
후덥지근합니다. 하하하.......
기쁨 :
바그완님 노래가 깨끗했어요.
바그완 :
조마조마한 마음이 실렸나 봅니다.
하하하.......
진이 :
감동적인 기도였어요.
머슴 :
오늘 창세기에서 볼 4장 마지막 부분과 5장의 내용이 족보인데, 이곳은 성서학에서는 해석에 있어서 의미 있는 비중을 두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놓고 일주일 고민하니까 이곳도 나름대로 재미있습디다.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풀 수 있는 것만 풀어볼게요. 방금 말한 여러분들의 느낌, 즐겁고 행복하고 깨끗하고....... 이것들이 오늘 여행할 내용에 다 들어있는 것 같아요. 그럼 창세기 4장 17절부터 5장 마지막 절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지루한 족보얘기지만 그 안에 몇 군데가 재미있습디다. 그 재미를 나눠볼까 합니다. 제가 먼저 한 절을 읽고 순둥이님부터 모두 한 절씩 읽겠습니다.
가인의 자손
4장 17절 :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을 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때에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다.
18절 : 에녹은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19절 : 라멕은 두 아내와 함께 살았다.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또 한 아내의 이름은 씰라이다.
20절 :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장막을 치고 살면서, 집짐승을 치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21절 :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인데, 유발은 수금을 타고 통소를 부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22절 : 또한 씰라는 두발가인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구리나 쇠를 가지고, 온갖 기구를 만드는 사람이다. 두발가인에게는 나아마라고 하는 누이가 있었다.
23절 :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24절 :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
셋과 에노스
25절 :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였다. 마침내,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말하였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나에게 허락하셨구나.” 그의 아내는 아이의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다.
26절 : 셋도 아들을 낳고,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아담의 자손
5장 1절 : 아담의 역사는 이러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2절 : 하나님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들을 창조하시던 날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고 하셨다.
3절 : 아담은 백서른 살에 자기의 형상 곧 자기의 모습을 닳은 아이를 낳고,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다.
4절 : 아담은 셋을 낳은 뒤에, 팔백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5절 : 아담은 모두 구백삼십 년을 살고 죽었다.
6절 : 셋은 백다섯 살에 에노스를 낳았다.
7절 : 셋은 에노스를 낳은 뒤에 팔백칠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8절 : 셋은 모두 구백십이 년을 살고 죽었다.
9절 : 에노스는 아흔 살에 게난을 낳았다.
10절 : 에노스는 게난을 낳은 뒤에, 팔백십오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1절 : 에노스는 모두 구백오 년을 살고 죽었다.
12절 : 게난은 일흔 살에 마할랄렐을 낳았다.
13절 : 게난은 마할랄렐을 낳은 뒤에, 팔백사십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4절 : 게난은 모두 구백십 년을 살고 죽었다.
15절 : 마할랄렐은 예순다섯 살에 아렛을 낳았다.
16절 : 마할랄렐은 아렛을 낳은 뒤에, 팔백삼십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7절 : 마할랄렐은 모두 팔백구십오 년을 살고 죽었다.
18절 : 아렛은 백예순두 살에 에녹을 낳았다.
19절 : 아렛은 에녹을 낳은 뒤에, 팔백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0절 : 아랫은 모두 구백육십이 년을 살고 죽었다.
21절 : 에녹은 예순다섯 살에 므두셀라를 낳았다.
22절 :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뒤에,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3절 : 에녹은 모두 삼백육십오 년을 살았다.
24절 :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25절 : 므두셀라는 백여든일곱 살에 라멕을 낳았다.
26절 :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은 뒤에, 칠백팔십이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7절 : 므두셀라는 모두 구백육십구년을 살고 죽었다.
28절 : 라멕은 백여든두 살에 아들을 낳았다.
29절 : 그는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짓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30절 : 라멕은 노아를 낳은 뒤에, 오백아흔다섯 살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31절 : 라멕은 모두 칠백칠십칠 년을 살고 죽었다.
32절 : 노아는 오백 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머슴 : 이 당시 사람들은 되게 오래 살았네?
하하하.......
머슴 :
학자가 그런 학자도 있습디다. 이들은 문화 문명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더 오래 살았을 것이라고 해요. 그 근거를 대는 것이, 공룡이나 매머드처럼 지금은 사라진 동물들의 생존 기간이 지금의 동물들보다 길었다는 겁니다. 크로마뇽인부터 쳐서 현생인류는 몇 만 년밖에 안돼요. 지구의 수명 40억 년을 하루 24시간으로 친다면, 공룡이 지구상에 생존했던 시간은 약 15분 정도이고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한 시간은 1~2분 정도래요. 그리고 창세기 여기에서 언급한 이 당시에는 지금의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한참 후에 시간 개념이 여러 가지로 나타났지만, 지금의 서양식 달력이 완성되는 것은 6, 7세기에 와서 굳어진 거구요. 그레고리력부터 지금의 현대적 시간 개념이 생겨난 것이지요. 시간이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고....... 여러분, 족보를 왜 기록해요?
.......
머슴 :
한국 사람들도 족보 좋아하잖아? 한국 사람들처럼 족보 쓰는 것을 좋아하는 민족이 이 토라를 쓴 유대인들예요. 아, 이 토라 번역을 읽는 것을 생략합시다. 이 부분은 토라와 성경이 거의 같고요. 사람 이름만 원어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표준새번역 성경에 ‘동침하다’가 ‘야다’ - ‘알다’로 되어있다는 것과 표준새번역에는 4장 17절에 ‘도시를 세웠다’고 되어있는데, 토라에는 ‘성을 지었다’라고 되어있는 것 외에는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흐음, 이것도 재밌는 표현인 거 같아. 왜 성을 지을까? ....... 하여간 오늘은 족보이야기니까 이건 다음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유대인들이 족보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제일 처음 알린 성서가 뭐유?
자연 :
마태복음.
머슴 :
그래 마태복음. 마태복음의 처음 시작이 뭐유? ....... 족보야. 그것두. 아담부터 예수님까지. 14대, 14대, 14대. 그거 구라유. 응? 그거 맞는 게 아니라구. 성서 기자가 일부러 짜 맞힌 겁니다. 14대, 14대, 14대. 아냐. 이건 성경이 얼마나 의도적으로 씌어졌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이 쓰셨기 때문에 무오하다 라고 말하는데 족보 따져가다 보면 14대, 14대, 14대가 아니야.
하여간, 족보를 왜 적어요?
하별 :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알려고요. 근데 요즘 족보 팔아먹으려고 쓰는 모양입니다. 자꾸 전화 와가지고 족보 안 사겠느냐고.......
하하하.......
머슴 :
나도 그래. 우리가 이북이거든. 근데 우리 할아버지가 족보를 놓고 내려오셨데. 그래서 그런 제의가 와요. 우리가 임씨인데 조상이 700년대에 복건성에서 왔데요. 그러니 물방울님과 나는 중국 사람이야. 허허허....... 근데 그게 맞어? 허허허.......
기쁨 :
나는 국제결혼 했네. 호호호
하하하.......
머슴 :
그렇네. 근데 기쁨님 김해김씨도 조상 할머니가 인도에서 왔어요. 김수로왕의 부인이 인도에서 왔고, 그분이 김해 허씨를 받았잖아요. 그래서 김해 김씨하고 김해 허씨는 결혼을 안 해요.
그 왜 족보를 쓸까?
자연 :
기억하기 위해서.
머슴 :
뭘 기억하기 위해서?
자연 :
근본.
수국 :
뿌리.
머슴 :
그럼 왜 서양 사람들은 족보를 안가지고 있을까? 서양은 왕족과 귀족만 족보를 가지고 있어요. 서민들은 없습니다. 해외토픽을 보았는데, 찰스 황태자의 아들이 대학에서 서민 여자를 만나 연애를 한데요. 그런데 결혼은 불가능할 거라고 해요. 왕실 초청으로 행사에는 초대되었는데 정식 부인이 될지는 미지수라고 해요. 그의 어머니 다이애나는 귀족 출신입니다. 유럽왕족들은 그걸 따집니다. 그런데 유럽왕족들은 피가 섞여 있지요. 스웨덴왕족, 덴마크왕족, 오스트리아왕족 등이 복잡하게 피가 섞여 있습니다.
자연 :
정략결혼을 하니까요.
머슴 :
응. 정략결혼 때문이지. 우리나라 재벌들과 같지 뭐. 재벌들은 사돈의 팔촌이 아닌 놈이 없어. 막 섞여가지고. 거 왜 그래? 인간이.
바그완 :
자기들이 남들과 다르게 특별하다. 고귀하다. 개들도 족보가 있어야 비싸지는 것처럼요.
자연 :
성을 쌓는 거죠. 자기들 외의 것을 성 밖에 두는.......
머슴 :
그래, 자, 여기 두 가지 얘기가 나왔잖아. 근본, 뿌리를 찾는 것과 남과 분리하는 것....... 분별지야. 근데 왜 성경에 갑자기 족보 얘기가 등장할까? 성서학자들은 이 부분을 빼고 노아의 홍수로 넘어가도 맥락이 이어지는데 지장이 없다고 하는데, 여러분들의 생각도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창세기 안에 섞여있는 전승이 대표적인 네 가지가 있다고 했지요? 이 부분은 어떤 전승 같아요? 야훼전승, 엘로힘전승. 제사장전승, 예언자전승이 있다고 했어요. 이건 어디 전승 같아요? 히브리서를 아는 사람은 금방 알 텐데....... ‘구원의 반차는 아론의 족보가 아니고, 멜기세덱의 족보다.’ ‘멜기세덱은 아버지,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언제까지나 제사장으로 계신 분입니다.’ 히브리서 7장에 이렇게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얘기하고 딱 맞는데....... 그럼 족보 따진 놈들은 누구겠어요? 아론이잖아. 그지? 아론이 뭐야? 제사장! 그래요. 이건 제사장 전승예요. 그럼 왜 제사장들은 계통을 중요시 했을까?
하별 :
하나님 빽 자랑하려고요. 후후후.......
머슴 :
자기네가 가깝다. 아이덴티티(identity)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단 말이지. 그럼 왜 유대인들이 이 아이덴티티(identity)를 특히 강조하느냐?
하늘 :
‘선택 받은 민족이다.’라는 거.
머슴 :
그렇지. 조선민족이라는 거지.
???
머슴 :
난 영어 했어요. 조선, 초우슨(chosen). 후후후.......
하하하.......
머슴 :
그거 강조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족보얘기를 하거든. 구약을 읽기 싫어하는 이유가 계속해서 이 족보얘기가 나오기 때문이거든. 거기다가 민수기에는 제사 형식만 좍 나열되어 있기도 해요. 거기다가 성막을 어떻게 만드느냐하는 얘기까지 나오지요. 그래서 지루해요. 그러나 어떤 시각에서는 재미로 읽혀지기도 해요. 하지만 이건 큰 의미는 없어요.
자,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석을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가 3장과 4장의 앞부분을 어떻게 해석했지요? 우리에게 분별지가 들어와서, 즉 생각과 느낌이라는 것이 들어와서 분리되었단 말이지요. 그래서 원래 절대인 우리가 상대의 세계에 떨어졌지요. 그렇게 상대의 세계에서 절대의 세계를 망각하고 잃어간다는 거지요. 그런 양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거지요. 그런데 인간은 상대와 절대를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 다루는 이곳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왜 가인의 족보를 맨 먼저 올렸을까?....... 자 칠판에 정리를 해 봅시다.
칠판에;
<族譜>
가인의 족보
1. 가인 - 2. 에녹 - 3. 이랏 - 4. 므후야엘 - 5. 므드사엘 - 6. 라멕 : 2번과 6번.
라멕의 자식들 : (아들); 야발, 유발, 두발가인. (딸); 나아마
아담의 족보
1. 아담 - 2. 셋 - 3. 에노스 - 4. 게난 - 5. 마할랄렐 - 6. 아렛 - 7. 에녹 - 8. 므두셀라 - 9. 라멕 - 10. 노아 : 7번과 9번.
여러분들은 이렇게 정리해 본 적이 없지요? 잘 보세요. 가인의 족보는 6번 라멕에서 끝나요. 천지창조 할 때에 몇 날에 끝나지요?
자연 :
여섯 번째 날이요.
머슴 :
그렇지. 6은 상대세계를 얘기하며 땅의 숫자야. 그리고 또 재밌는 것이 뭐냐 하면, 비교를 해봤는데, 가인의 바로 밑의 자식이 에녹이잖우? 2대란 말이야. 근데 아담의 손자에도 똑 같은 이름의 에녹이 있어요. 또 라멕도 있어요. 동명이인일까, 동일인일까? 이건 뭔가를 상징하는 걸 거야. 경전이 이렇게 쓰고 있으니까요. 우리 이름에는 뜻이 있습니다. 일본사람들도 마찬가지구요. 서양 사람들의 이름은 이 바이블에서 옵니다. 죠셉이 요셉이구요. 샘은 사무엘에서 오구요. 톰은 토마스, 도마에서 왔지요. 존이 요한입니다. 이것은 의미를 계승하는 겁니다. 그래서 에녹과 라멕의 의미를 두세 개의 주석서에서 찾아보았는데 나오지 않더라구요. 그러나 이 에녹과 라멕의 이름 속에는 의미가 있겠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이렇게 중복시켰을 거예요.
예수라는 이름이 그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흔한 이름이었어요. 최근에 예수의 이름을 가진 무덤이 발견되어서 예수의 부활이 부정되었다고 토픽에 나왔는데, 반박하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다. 라고 합니다. 예수란 이름이 당시에 흔했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양쪽 다 예수의 부활을 삼차원적인 것으로 다루어서 이런 논쟁을 벌이는 겁니다.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부활로 여기고 있는 거지요. 상대의 세계에 얽매인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예수는 부활했어요. 걱정하고 떠들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똑같이 부활할 거구요. 이걸 모르는 자들은 니고데모를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으음, 이건 옆길로 새는 이야기이고.......
하여간 이 에녹과 라멕의 이름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에녹은 가인으로부터 2대이고 라멕은 6대입니다. 아담의 족보에서는 에녹은 7대이고 라멕은 9대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족보에서 간단히 누구 낳고 몇 살에 죽었다는 간단한 기술을 하다가 네 사람만 부연설명을 합니다. 3. 에노스, 7. 에녹, 9. 라멕, 이구요. 마지막 10. 노아에서 입니다. 여러분, 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경전은 가려져 있습니다. 그 가려진 것을 열어봐야 보이는데요. 그걸 종교적인 용어로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글로 써 있는 것만 다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부연 설명한 곳에는 뭔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계시, 메시지, 메타포가 있다는 겁니다. 자, 보세요.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이건 제 해석입니다.
가인의 자손
4장 17절 :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을 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때에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다.
18절 : 에녹은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19절 : 라멕은 두 아내와 함께 살았다.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또 한 아내의 이름은 씰라이다.
20절 :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장막을 치고 살면서, 집짐승을 치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21절 :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인데, 유발은 수금을 타고 통소를 부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다.
22절 : 또한 씰라는 두발가인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구리나 쇠를 가지고, 온갖 기구를 만드는 사람이다. 두발가인에게는 나아마라고 하는 누이가 있었다.
왜 에녹일까요? 왜?....... 여기 가인의 족보에서 에녹은 성을 쌓았다고 했어요. 여러분, 도시가 왜 만들어지나요? 그것도 2대째에? 그럼 아담의 족보에선 7대째에 도시가 만들어지나? 2란 무엇입니까? 두 개, 즉 상대입니다. 가인의 족보에서 2와 6대만 얘기합니다. 이건 상대의 세계만 얘기한다고 봐야지요. 그럼 ‘도시를 건설했다.’, ‘성을 쌓았다.’ 이 얘기는 뭘까?....... 그리고 라멕은 부인도 둘이고 자식도 둘씩만 있네요. 2라는 숫자가 강조되어 있으며 자식들에 대해서는 직업까지 나옵니다. 이것들이 다 뭘 의미할까요? 이것이 가인의 족보를 쓴 이유가 다 풀리는 물음인데요....... 또 하나 재밌는 것이 라멕의 자식 중에서 아들들에게는 이름에 ‘발’자가 들어갑니다. 이건 주석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가인, 카인이 무슨 뜻을 갖고 있다고 했지요? 만들다, 생산하다. 낳다의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발’자에도 그런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야발은 낙농업자이고, 유발은 예술가, 두발가인은 공예가 또는 제조업자입니다. 이런 의미들이 다 연결되는 건데.......
나그네 :
문명!
머슴 :
그렇지. 문명, 문화가 상대세계에서 일어났다는 얘깁니다. 누구로부터? 가인의 후손으로부터! 가인의 후손들은 상대의 세계에 떨어진 사람들예요. 그럼 아담, 셋 족보는 상대의 세계에 떨어져 살지만 절대의 세계를 잊지 않은 사람들이야. 스스로 계신 그분을 잊지 않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않는 사람들의 족보입니다. 가인의 족보를 쓴 이유 중 하나가 상대의 세계에 매몰된 사람들도 이어이어 간다는 겁니다. 이어가지 않는 것은 없지요. 있음은 어떻게라도 계승되어 가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인의 족보와 아담의 족보를 대비시킴으로써 두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거지요.
그럼, 이건 좋고 저건 나빠?
나그네 :
그렇진 않죠.
머슴 :
네, 그렇지 않아요. 이거 좋고 저거 나쁘고 하는 것이 기울어져 사는 거예요.
4장 17절 :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을 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그때에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를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고 하였다.
자, 가인도 누구하고....... 그런데 가인의 여편네 이름은 안나오네. 아, 여편네는 비하하는 말인가? 여편네는 옆에 있는 사람인데. 비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아내는?
여러 명이 :
안에 있는 사람.
머슴 :
아녜요. 내 안의 해, 태양예요. ‘안해’ 내 안에 있는 태양이 아내입니다. 나는 기쁨님을 태양처럼 모시잖아요.
하하하.......
머슴 :
여편네는 옆에 있는 사람. 그럼 남편은?
민들레 :
남의 남자.
하하하.......
머슴 :
그건 좀 해석이 아니다. 뭐, 바람피는 게 남편의 상징인가? 후후후.......
가인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니....... 동침한다가 히브리어 원본에는 ‘야다’ 즉 ‘알다’로 되어있다고 했지요? ‘알다’는 우리가 ‘더불어 함께한다.’로 풀었지. 그럼 함께 한다는 것은 뭘 함께 한다는 거유?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갑시다. 사랑도 ‘살앙’으로 ‘삶을 함께 더불어 한다.’로 풀었지요? 그럼 함께 어떤 행위를 하나요?....... 우리 살림마을 수련회 들어가며 같이 하는 것 있잖아요. 뭘 같이 해요?....... 먹고, 자고, 싸고, 앉고, 서고, 울고, 웃고, 눕고....... 그게 함께 하는 겁니다. 그렇게 했더니 뭐가 생겼데?....... 자식이, 생명이. 그렇게 할 때만 생명이 이어진다는 거지. 상대에 떨어졌든, 절대에 있든 상관없이.
2대라는 것이 상대이며 분리인데 성을 쌓는 것도 분리입니다. 나만의 성을 쌓는 겁니다. 근데 이것으로부터 문명, 문화가 발생하는 겁니다. 그럼 왜 문명, 문화가 생길까? 어떻게 해서?....... 바로 이어서 23절 24절이 그걸 얘기하는 것 같아요.
23절 :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24절 :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죽였데요. 자신을 해치면 일흔일곱 갑절로 벌을 받는데요. 그럼 아건 무슨 얘길까? 순전히 복수하는 얘긴가?.......
최근에 지식 산업 사회에 오면서, 미래학자 사무엘 헌팅턴이라고 있는데, 엘빈 토플러와 책제목도 똑 같이 제3의 물결이라고 책을 냈어요. 이 사람은 미국을 대단히 떠받드는 극우보수주의자인데, 미국에게 알랑방귀 낀다고 한국도 높이 평가해요. 아주 또라이야. 그 사람이 얘기 했죠. ‘문명이 충돌한다.’ 그럼 상처 입히는 것이 뭐겠어요? 지금의 우리로 조명 해봐요. 기독교 문화권이 이슬람 문화권에 상처를 줍니다. 또 동양 문화권에도 상처를 줍니다. 중국에서는 상처를 받았다고 봅니다. 동양권에서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중국이었어요. 근데 중국 들어가서 선교사들이 한 짓이 뭐냐? 그들은 제국주의하고 같이 들어갔거든요. 식민지화의 방편으로 같이 들어간 거지요. 인도도 마찬가지고요. 식민지화 한 나라는 모두 이런 식이었지요. 그래서 식민지를 자기네들 상품시장화 한 것이지요. 그리고 원주민들은 고유의 문명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게 힘과 함께하여 밀고 들어온 기독교가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어요? 도둑놈들로 보였을 거야. 사무엘 헌팅턴은 그런 식으로 지금이나 미래에도 문명은 충돌할 것이라고 보는데, 그러면서도 기독교 문화권이 우월할 것이라고 보는 거지. 반면에 엘빈 토플러는 그렇게 안 봐요. 그는 아주 객관적으로 봐요.
자, 23절, 24절은 문명의 충돌을 의미한다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문명은 충돌을 통해 흡수 발전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상대의 세계는 이렇다는 것을 성경이 쓰고 있는 겁니다. 성경이 BC200~300년대에 압축되었을 거라고 보는데, 그 당시에 이렇게 상대세계의 문명의 기원과 발달을 벌써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예수쟁이들은 다르게 얘기하잖아. BC1000년 BC2000년의 얘기라고 하지요. 그러나 성격이 문자화되어서 결집된 것은 구약은 BC300년대 입니다. 유대인들이 멸망해서 바빌론으로 흩어진 BC586년경으로부터 BC520년에 고레스가 유대인을 보내주기 시작했고, 이때 나라 없는 유대인들은 서서히 전승을 모으기 시작했고, BC3~4세기부터 문자화되어 압축되어 씌어졌다고 보는 것이 거의 정설입니다. 그러니까 BC3~4세기에 이런 걸 쓰면서 삶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참으로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의 위대한 모습입니다. 그것도 계시로서 하는데, 그래서 여러 가지 해석도 나오고 있지요. 초기 교부 중에는 그 뜻을 잘 풀어서 해석한 분이 오리겐이라는 분이래요. 200년대 중반에 살던 분인데, 가톨릭과 오소독스에서는 이단으로 취급되고 말았지요. 한 가지 설 때문에요. 하나님은 악마도 구원한다고 주장해가지고 이단이 됐어요.
오늘 김흥호 선생님에게 얘기 들었는데, 조로아스터교에서 아후라 마즈다가 여호와와 같다고 내가 한번 말했잖아요. 유일신, 스스로 있다, 존재를 말하는데, 선악이 등장하며 딜레마에 빠진 거야. 그럼 악도 하나님이 만들었네? 이렇게 된 거야. 그래서 해결이 안 되니까 조로아스터교에선 또 하나의 신을 만들어요....... 후후후 그러니까 신은 누가 만드는 거야?
나그네 :
인간요?
머슴 :
너무 그렇게 직설적으로 얘기 하지마. 후후후....... 속으로만 갖고 있어요. 후후후.......
하하하.......
머슴 :
진짜 그런 것 같아....... 그분은 이름도 없이 근원으로 계신데, 디리 만들어내. 이름도 그냥 갖다 붙이고 말이야. 이슬람은 그 양반을 알라라는 거거든. 한국 예수쟁이들은 하나님, 하느님이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야훼라고 한단 말이야. 원래 그 양반 이름 없어요. 그래서 김경제 선생님은 ‘이름 없는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거야. 그리고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없이 계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도 알고 보면 다 표현이지. 그냥 계셔. 그럼 돼. 그래서 나는 ‘그분’ 소리를 잘해. 그분! 그럼 좀 객관화되는 것 같아서. 후후후.......
그럼, 문명 문화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요? 요거 하나만 짚고 가인의 족보를 끝냅시다. 상대세계에서 문명, 문화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지? 지금도 인간들은 계속해서 문화를 창출해 내고 있거든요. 지금을 포스트모던시대라고 합니다. 이건 사실 정의가 안 됩니다. 한참 지나야 정의되는 것이지요. 지금 살다보니까 20세기 초를 모던이라 했는데 지금 우리는 그 모던을 지났다는 거지. 해체되었다. 해체된 모던을 살고 있다는 건데, 그거 이상으로 이거다! 라고 아직 표현을 못해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포스트모던에서 특징의 하나로 ‘다양성 인정’이 들어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다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거지. 이거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우리를 표현할 때 중요한 특성으로 삼아 쓸 것 같아요.
언제 일어나요? 문명은?
하늘 :
일할 때.
머슴 ;
그렇지. 또?....... 답 없어요. 자기 얘기들 해요. 대답을 해야 가슴에 새겨지는 거예요. 람스 예배는 참여 안하면 얻어가는 것이 별로 없어요.
나그네 :
동침할 때. 더불어 함께할 때.
머슴 : 호오 말 되네. 또?.......
자연 :
자기 디자이어(desire)를 실현할 때.
머슴 :
그렇지. 자기 디자이어(desire)를 실현할 때 문명은 탄생하고 발전해 나아갑니다. 여러분들이 상대의 세계에서 자신의 디자이어(desire)를 선택 없이 팍팍 실현할 때 이지요. 거기에는 좋고 나쁘고가 없어요. 절대가 거기에 있으며 디자이어(desire)의 실현을 외면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런데 좋고 나쁘고는 어디에 있어? 분별지에 있어요. 상대는 상반되는 힘의 충돌로 디자이어(desire)의 실현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절대와 상대는 우리에게 항상 같이 있는 거예요. 우리 몸을 봐요, 우리는 지금 영혼은 없고 몸만 있나요? 아니지요. 같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는 삼차원과 사차원이 공존하고 있으며 분리할 수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가인의 족보와 아담의 족보를 같이 쓰는 거라고 봐요. 그러니까 뒤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편에서도 노아만 나오지 않고 노아를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같이 나오는 겁니다.
자,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셋과 에노스
25절 :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였다. 마침내,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말하였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나에게 허락하셨구나.” 그의 아내는 아이의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다.
주석서에서 셋의 의미에는 ‘그가 허락하셨다.’ ‘그가 낳으셨다.’ 이런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낳으셨다.’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이런 뜻예요. 그러니까, 절대는 계통이 근원으로부터 온다는 거지. 우리가 모두 근원으로부터 와요. 그 양반이 허락 안 했으면 우리 여기 못 와요.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대칭적으로 해석하면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족보를 쓰고 있는데, 마태가 족보를 쓰면서 아담부터 시작을 해요. 그것은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가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거기에서 왔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그렇게 온다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동안의 기독교에서는 예수만 그리스도라고 얘기했습니다. 나는 지금 그걸 부인하는 겁니다. 솔직하게 깨놓고 얘기하면 말예요. 그래서 나는 기존의 기독교단에 가면 이단이 됩니다. 그러나 나는 그 그리스도라는 본질이 우리에게 다 있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영이라는 겁니다. 예수쟁이들이 이율배반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하고 얘기하잖아요. 그럼 그 성령이 뭐야? 삼위일체를 얘기하는 건데, 성령은 곧 그리스도입니다. 또 곧 아버지 하나님이 되는 거야. 그럼 나는?....... 나를 거기서 제외해 버리면 안돼요. 나도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 안에요. 그러니까 내 안의 그리스도성이, 성령이 더불어 함께하고 있음을 깨달으면 그게 바로 내가 그리스도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거지요. 그걸 극명하게 주장하는 분이 한국에선 다석 류영모 선생예요. 선생님은 ‘기독교에서는 예수만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시는 성령이 곧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얘기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 ‘오시는 그리스도!’ 재밌지 않아요? 어디에 올까?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 예수라는 이름을 갖고 온 청년만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얘기지. 그래서 신약에 오면 신약 기자가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우리 족보가 하늘까지 닿는다는 거지. 여기서는 ‘족보가 하늘까지 닿는다는 것’과 대칭되는 것이 ‘하나님이, ....... 허락하셨구나.’입니다.
26절 : 셋도 아들을 낳고, 아이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에노스는 주석서에 그 뜻이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담’하고 같은 의미랍니다. 에노스가 사람의 뜻이 있다면 에녹도 그런 뜻이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이때, 3대에 와서 드디어 ‘주님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왜?....... 여러분 예배를 왜 드린다고요? 지난주에도 물어본 것 같은데?....... 람스에 왜 와? 안 빠지고 열심히 오는 사람들이 열 명은 있어. 난 열 명의 제자는 있어. 후후후 뿌듯해! 작은 선생 노릇 하는 것 같아서. 후후후....... 아침햇살님도 수련회 때는 그렇게 사람이 많아도 예배 때는 20명 내외야. 곱부나 컵이라고 인도에서 그 얘기가 나와서 선생님하고 눈 마주치고 한참을 웃었네. ‘전원교회나 람스나 곱부가 컵입니다.’ 하하하.......
하하하.......
거 무슨 얘길까?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했다는 걸까?
바그완 :
자기 존재를 기억하려고요.
머슴 :
그렇지. 그때부터 절대를 잊어먹지 않으려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상기하려고 했다는 거예요. 깨달음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불교용어로는 견성을 추구했다. 각성을 하기 시작했다. 이 얘기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3이야? 왜 3대 때 그랬을까? 그러니까 이게 메시지라는 겁니다. 3은 참입니다. 하늘, 땅, 사람. 또 하나 오늘 김흥호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 仁 : 어질 인에서 사람 인 변 옆에 一자 두개가 위의 것은 하늘이고 아래 것은 땅이래. 그래서 이 仁이라는 글자에는 천, 지, 인이 같이 있는 것이래. 이건 삼위일체와 통해요. 하늘은 성부이고, 사람이 성자이고, 땅은 성령예요. 이 온 땅에 성령이 가득 차서 세상을 만들고 있잖아요? 그리고 계속 오고 있고요. 기존 교회에 가서는 이런 얘기하면 이단이라고 찍히니까 하지 말고....... 그래서 3대 째 그 얘기를 한다는 거지.
그 다음에,
21절 : 에녹은 예순다섯 살에 므두셀라를 낳았다.
22절 :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뒤에,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3절 : 에녹은 모두 삼백육십오 년을 살았다.
24절 :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7대 째에 에녹이 나옵니다. 기가 막힌 얘기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데요. 몇 년을? 300년을. 3 x 100입니다. 3은 완전한 수라고 했고, 100은 무한대를 얘기합니다. 그렇게 동행했다. 그리고 에녹이 얼마를 살았느냐? 365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일년을 꽉 채우는 날 수. 오늘을 오늘로 산거죠. 오늘을 산 사람입니다. 7대째. 7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이렇게 완전하게 산 사람입니다. 하루도 무의식에 빠지지 않고 완전하게 깨어서 산 사람입니다.
28절 : 라멕은 백여든두 살에 아들을 낳았다.
29절 : 그는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짓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30절 : 라멕은 노아를 낳은 뒤에, 오백아흔다섯 살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31절 : 라멕은 모두 칠백칠십칠 년을 살고 죽었다.
라멕은 9대 입니다. 9는 3 곱하기 3이지요. 그리고 777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건 무슨 의미겠어요? 이것도 무한대를 의미합니다. 예수한테 누가 몇 번 용서하냐고 물으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의미지요.
근데 용서는 해라 마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때의 서(恕)는, 공자의 인(仁)이 무엇이냐고 한 제자가 물으니까 증자가 충(忠)과 서(恕)요 라고 얘기할 때의 서(恕)입니다. 충(忠)은 신실함입니다. 이건 나를 다함입니다. 그러면 서(恕)는 무엇이냐. 같은(如) 마음(心)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을 서(恕)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변질되었지만 용서란 원래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고, 마음나누기 표현으로 하면 공감을 넘어 동감이 되는 것이지요.
32절 : 노아는 오백 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라멕이 낳은 아들이 노아입니다. 노아는 10대 입니다. 10은 하늘 숫자입니다. 절대를 얘기합니다. 초월을 얘기합니다. 12는 땅의 숫자입니다. 그래서 일 년이 열두 달입니다. 노아는 오백살이 지나서 자식을 낳습니다. 동양의 오행과 오온은 상대세계의 근본을 다섯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불교에서 달마 대사의 달마는 다르마인데, 다르마는 법(法)입니다. 이 법(法)에는 다섯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 핵심이 진리와 존재입니다. 그런 게 상대의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이 된다는 거지요. 에센스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백입니다. 그리고 세 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이 셋이라는 숫자도 완전함을 얘기합니다.
여기가지 마무리하고, 우스개 소리를 하나 하면, 60년대 70년대에 이렇게 해석한 놈들이 있어요. 샘, 샘족은 백인종이고, 함은 황인종이고, 야벳이 나중에 저주 받는데, 야벳을 흑인종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흑인들이 고 모양 고 꼴로 산다고 설교한 미국의 목사가 있었어요. 그랬어요. 지금에 와서도 반성문 하나 제출 안 하고 있지요.
하하하.......
기쁨 :
저도 들어봤어요.
머슴 :
그런 놈들이 요한 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면, 666을 사탄의 숫자라고 하며 그것이 바코드로 세상에 출현했다고 했지요. 어떻게 666이 사탄의 숫자인가? 666은 상대의 세계를 표시하는 숫자예요. 그들은 또 사탄의 열 나라가 EU고, 그 사탄의 괴수가 교황이라는 둥 그따위 해석을 했어요. 어떻게 잘 있는 교황님을 사탄의 괴수라고 할 수 있나요?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어리석을 수 있는지. 이놈들도 여태 반성문 제출 안 하고 있어요. 다행히 요즘 그런 해석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있어요.
자, 오늘 얘기들 아시겠지요? 메타포와 수비학의 신비를 숨겨놓고 있다는 것. 저는 11장까지의 원역사는 계속 이런 식이라고 보아요. 상대의 세계와 절대의 세계를 죽 번갈아 가면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죠. 어쩌면 내가 요즘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아서 그렇게 해석되는 지도 모르지요. 원래 해석하는 사람의 관심이 많은 방향으로 해석이 나오게 되어있거든요. 여러분은 이렇게 보는 시각이 어때요?....... 괜찮죠? 이런 식으로 상대와 절대의 두 라인을 묘하게 교차하면서 메타포를 주는 곳이 바로 신약에선 요한복음예요.
오늘 창세기 5장까지의 묵상 나눔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근데 우리가 상대를 진실하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절대도 가까워지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요즘 느끼는 것이 상대도 철저하게 참이어야 한다. 그렇게 의미로 다가와야 생명도, 존재도, 영생도 목적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마음나누기 합시다. 하늘님부터 하시지요.
하늘 :
왜 족보를 내세울까. 지금의 나. 그 자체로만 세우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무엇인가 기대어야만 되는 그곳 정통성이라는 것이 다른 이에게 기대어서야만 나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봤고....... 저를 지금 여기에 있게 하신 어머니의 생신이 오늘입니다. 예전에도 생신이면 모여서 같이 식사하고 하였지요. 항상 어머니가 일을 다 하시었는데, 어제가 마침 쉬는 토요일이어서 어제는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음식 준비하고 어머니 생신을 치렀습니다. 진작 이렇게 했었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었는데 왜 미루어왔을까. 바쁘기도 했고 핑계도 많았지만 이번에 딱 한번 해보니까 그 다음부터는 잘 할 수 있겠다. 아니 잘 한다기보다는 하는데 부담 없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전에 못 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아멘.
기쁨 :
상대세계와 절대세계, 3차원과 4차원. 이걸 많이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멘.
여백 :
다들 생각들뿐입니까?
하하하.......
머슴 :
다들 머리형들이라 생각만 나오잖아. 하하하. 머리형인 기쁨님이 옆에 있는 것이 좋아. 어제 꿈을 꿨거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모닝 페이퍼를 했어요. 꿈 내용을 썼지요. 난 해석이 안 되더라고. 그런데 아침에 김흥호 선생님에게 가는 길에서 기쁨님이 해석을 해주는데, 햐. 기막히게 딱 맞는 해석을 해주는 거야.
하하하.......
머슴 :
꿈에 두 친구 목사가 등장을 했거든, 한 놈은 내가 우습게 아는 목사이고, 한 놈은 내가 존경하는 놈이었어요. 꿈속에서 내가 한 놈에게는 영적 교만을 부리고 있더라고. 우리 기쁨님 해석으로 나의 영적 교만을 깨우칠 수 있었어요. 정말 기쁨님은 제게 태양예요. 나를 돌아보게 해주었어요. 덕분에 회개할 수 있었어요.
하하하.......
수국 :
아침에 있었던 일인데, 장을 보러 갔는데요. 횡단보도에서 차가 내게 돌진을 하다 급정거를 하더라고요. 그 횡단보도가 거의 10년간 거기 없었는데 약 석 달 전에 생긴 거지요. 그래서 거기를 다니던 차들은 습관 때문에 횡단보도를 무시하고 획 지나가고, 사람들도 차가 없으면 신호등을 무시하고 무단횡단을 하고 있지요. 제가 매우 놀랐는데, 기존의 습성이 있었는데 새로운 규칙이 생기면 그 습성이 바뀌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사람도 매우 놀랐겠지요? 내가 쳐다보면 미안해 할까봐 서둘러 그냥 지나갔는데, 내내 그 습성이란 것을 생각했습니다. 아멘.
머슴 :
머리형들은 끝에 ‘생각했습니다.’로 끝나네. ‘할 겁니다.’로 끝나는 사람들은 장형이겠지? 그럼 가슴형들은 ‘라고 느낍니다.’라고 할 거야.
하하하.......
수국 :
살아있어서 기뻐요. 호호호.......
머슴 :
기뻐요? 가슴형이란 말이네? 그런가?
진이 :
자, 그럼 여기 가슴형의 소감을 들으시겠습니다.
하하하.......
진이 :
족보얘기를 상대세계와 절대세계로 풀어주신 얘기를 들으면서 놀랍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고요. 생각을 해봤어요. 처절하게, 절박하게 정말 치열하게 상대세계를 살지 않으면 절대세계가 보이지 않지 않을까하고 얼마 전부터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 두 세계가 조화를 이루어 내 안에서 살아간다는 그런 경험을 하고 있어요. 오늘 말씀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조화롭게 잘 살고 있습니다. 아멘.
나그네 :
전에 이름이 황진이 아니었나요?
머슴 :
처음에 어린왕자였지. 그랬다가 에니어그램 할 때는 그리스도였다가, 황진이에서 진이로 되었네.
진이 :
진이라고 하니까 섹시하게 들린 데요. 이번엔 아주 마음에 듭니다. 호호호.......
하하하.......
자연 :
앞에 네 분이 마음나누기를 하시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제 어머니 생신은 이번 수요일이어서 하늘님 고백을 들으니까 갑자기 부담이 팍 들어옵니다. 수요일에 일 갔다 와서 뭘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저를 짓누르기 시작합니다. 호호호.
하하하.......
자연 :
진이님은 벌써 이름을 여러 번 바꾸셨는데 저는 너무 한 이름만 고집한 것이 아닌가. 좀 변화를 주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주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대와 절대를 얘기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그것들이 배척하며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을 보면서 여기 이곳에서의 저의 삶이 잘 어우러져가야 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고요.
이번 주에 계속 눈이 왔잖아요. 너무 신비로운 거예요. 2월에 봄이 왔다가 3월에 겨울이 오고, 아침에 따스한 햇살이 있다가 오후에 쌀쌀한 바람과 함께 눈이 내리며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롭고....... 거기다 사람들의 반응이 다 제각각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 건지 무섭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눈 내리는 것을 신비롭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눈이 오는지 마는지 책상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도 있고, 넓게 다 보이는 세상이 신비로웠습니다. 아멘
머슴 :
삶에서 신비를 알아차리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제가 요즘 과학책 하나 잡아 읽고 있는데, 미국에 유명한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한 얘기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자리가 좁다는 것 같은 거에만 신경을 쓴다는 거예요. 그런데 땅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보는 사람은 육중한 비행기가 뜨는 것을 신비하게 느낀다는 겁니다.
나그네 :
생일 얘기들을 하시는데, 어제가 제 생일이었습니다. 어제 친구들 따라 산에 갔다가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2년 전에 한 1년간을 앓고 난 후에 사람이 늙어가고 죽어간다는 것을 굳어지는 몸을 느끼며 통감했습니다. 누웠다가 일어나도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체력의 저하를 여실히 느끼며 노쇠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통감하기도 했어요. 사람이 늙어서 죽어갈 때 몸은 어떻게 움직이겠구나 하는 것이 상상이 될 정도로 깊은 경험을 했지요. 그러고 1년간 회복이 되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어제 산을 가보니까 얼마나 아직 내 몸이 형편없이 망가진 채로 있는가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달리 몸이 고통을 하소연해오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들여다보면서 어디까지 내 몸이 견디어내는지, 내 몸이 견디는 것이 어디까지 인지를 한번 보기로 하며 쉬지 않고 산행을 해 봤어요. 숨이 가쁜 것, 다리가 힘없이 꺾이며 고통을 호소해 오는 것을 살펴보고 알아차리려고 했지요. 그랬더니 평상시에는 알아차릴 수 없었던 몸의 허약함이라든가 오랫동안 죽은 듯이 잠자고 있던 신체 각 부분의 무기력들을 알아차릴 수 있겠더군요. 느끼기에 그런 부분들은 마치 이미 송장의 그것처럼 보여지더라고요. 많은 부분이 죽어있었고 일부만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냥 놔두면 그런 식으로 점점 더 굳어져 죽어가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등산하는 동안 저는 제 몸에 상당한 시간동안 오래 집중하여 주시하였던 것 같아요. 숨 가쁘게 움직이던 몸 안에서 상당기간 유지되던 고요함을 가져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산에서 휘몰아치던 눈보라는 아득한 거리감을 가지고 아름답게 느껴졌고요. 산등성이를 넘자 감쪽같이 눈보라가 사라지고 포근한 봄 날씨가 감돌았는데 고통 속에서도 저에게 미소가 피어오르게 하더군요. 겨울과 봄의 날씨를 다이나믹한 명상 중에 새롭게 느껴보는 감각으로 접할 수 있어서 고통마저도 보람이 된 하루였습니다. 그리고 등산 끝나고 저녁 먹으며 친구들이 생일 축하해줘서 생일 턱도 먹은 셈이 되었고요. 고통 속에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제가 장남인데, 젊어서 아버님이 제 앞에서 자꾸 족보얘기를 하시는 것이 싫었어요. 뭔가 가문의 짐을 지우시는 것 같은 부담을 느꼈었나 봐요. 그런데 오늘 족보 얘기를 들으면서, 그 안에 수비학적인 비밀을 감춰놓은 것을 보면서 제가 집 안의 족보를 보다가 흥미를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옛날 사람들의 살았던 이야기 속의 비밀을 파헤치듯이 족보를 더듬어 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 속에 비밀이 있어서 오늘의 나에게 뭔가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환상 같은 것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나는군요. 과거와 핏줄로 연결된다는 것이 삶에 있어서 하나의 신비가 되어 지금의 생명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족보라는 것이 단순히 따분한 기록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상기할 수 있는 신비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머슴 :
생명의 이어감을 피부로 느끼는 거예요. 207기는 수련회 마지막 날 가족 세우기 안했나? 그거 할 때 이어감의 영적 메시지가 확 들어오는데. 특히 가족에 화 날 일이 있은 사람이 많은 기수에는 꼭 합니다. 여기 내가 있으면 윗대에 아버지 어머니가 있지요? 그 윗대에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있습니다. 그 윗대에는 여덟 분이 계시지요? 그리고 그 윗대에 열여섯 분, 이렇게 4대만 가도 조상이 개인당 30명이 됩니다. 이 30명을 삼각형으로 세워 놓지요. 이렇게 가족을 세우는데, 그 중에 하나라도 뺄 수 없습니다. 내가 지구에 올 수 없었습니다. 이중에 한 할머니가 기생이었어요. 빼자! 못 빼지. 이 할아버지가 상머슴이었어요. 빼자! 못 뺀다구. 이렇게 삼각형으로 사람을 세워놓고 보면 진짜 눈물나요. 이 수련 중에 산파들이 그 중에 한 사람 빼자고 가서 잡아당기면 당사자는 쏜살같이 달려와서 막고 난리 나요.
나그네 :
아....... 상상이 갑니다.
족보를 남을 향한 배타적인 것으로 인식할 때는 거부감이 생겼는데, 족보 속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느끼면서 옛날 얘기 보듯이 보니까 친밀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족보가 개인의 정서에 도움이 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머슴 :
족보얘기가 나와서 여러분들에게 하나 얘기할 것은, 조선시대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유교를 굉장히 멸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일제의 교육의 잔재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유교가 얼마나 멋있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느냐하면, 4대까지 제사를 지냅니다. 기억하는 겁니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지금 자신의 생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왔는지....... 그러니까 여러분은 제사를 꼭 지내세요. 어떤 형태로든지. 예수쟁이면 예배를 통해서 그분들을 기리고, 또, 상 놓고 절해도 돼요. 가톨릭은 얼마 전에 인정 했어요. 아직 개신교는 제사지내지 말라하지만 괜찮아요. 그것들은 하나님도 모르는 놈들이야.
하하하.......
뱃사공 :
어제 나그네님하고 북한산 같이 갔었지요. 나그네님 덕택에 제가 건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뿌듯했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하하하.......
머슴 : 물방울님 하고 누가 체력이 더 나아?
뱃사공 :
거의 막상막하입니다. 하하하....... 정말 나그네님 때문에 제가 건강하다는 자부심이 생겼으니까요. 하하하....... 산에 올라가면서 상대적인 것을 많이 느꼈는데, 집에서 나올 때는 봄으로 옷을 가볍게 하고 나왔지요. 하늘도 맑고 봄산이 참 좋겠구나하고 갔는데, 중턱에서 비가 쏟아지고 정상에 가까워서는 눈이 내리치며 바람이 세어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러다가 성곽 반대편으로 내려갈 때는 바람 한점 없이 따뜻한 날씨가....... 그리고 전 산에서 겨울바다를 보았습니다. 여기가 겨울바다구나 한 것은 눈보라가 강한 바람에 몰아치면서 그 강한 바람이 나무 숲 사이로 파도치는 소리를 내더란 거죠. 마음에 새로운 감이 일어나는 것이 산에 오르고서야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고생 중에도 봄과 겨울과 그리고 바다를 한꺼번에 가질 수 있었던 산행이었습니다.
오늘 여행한 창세기의 이 부분은 항상 짜증나던 곳이었습니다. 창세기를 읽다가도 이 부분만 나오면 덮어버리는 곳이었지요. 누가 누굴 낳고, 몇 살까지 살다 죽고....... 그런데 머슴님이 오늘 풀어주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하고 참 좋은 느낌이었습니다. 또한 족보라는 것에서 내가 어떻게 이곳에 서 있구나하는 나의 서있음의 근본 뿌리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장을 읽어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머슴 :
아, 지금 자연님이 귓속얘기를 하는데 그것 참 좋은 단초입니다. 아담이 셋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가인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담은 절대와 상대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시초이기도 하면서 절대자가 처음으로 직접 손을 대서 만들기도 한 존재이지요. 그를 통해 우리는 절대와 상대를 함유한 채 절대자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가 예수의 근원을 아담으로까지 이끌고 간 것이구요. 거기서 절대자와 연결되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도 또한 우리도 아담과 같이 같은 선상에서 중보자이며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생기 :
어제 엄마에게 내려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동생네 보신다고 올라오신다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제 마음 속에 심통이 났었지요. 엄마가 밥 먹자고 동생네 오라시는데 싫다고 놀러간다고 하고는 스키장에 갔습니다. 넘어지고 다치고 그랬지요. 참 제가 유치하다. 아직 어린애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주에 머슴님이 보는 연습을 하라고 하셨거든요. 했습니다. 처음엔 울었습니다. 정말 생각대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화초를 보며 있음 자체를 보다가 생각으로 그 화초를 칼로 확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보는데, 그 잘린 상처가 아프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는 것을 안 순간 잘린 채로라도 그 있음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있음 자체로 충만하다는 것을 보게 된 거죠. 상처도 내 생각이고, 온전하다는 것도 내 생각이고, 그 생각이 지워질 때 그냥 봄을 통해 거기에 있는, 있음 자체로 충만하다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본다는 것이 점점 새로운 느낌을 가지고 조금씩 다가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야겠지만요.
머슴 :
40일을 꾸준히 하십시오, 그러면 뇌공학에서 말하는 길이 납니다. 그리고 그런 호르몬이 작용을 해줍니다. 그 중에 중단을 하면 호르몬 분비도 그치고 길이 나려다가 없어져 버립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들은 이 뇌공학으로 문제를 풀어요. 하비람에도 영성훈련에서 우울증 같은 뇌질환이 있는 사람이 들어오면 약 먹여가면서 합니다. 그 약이라는 것이 뇌에서 호르몬 분비를 촉진시켜주는 거래요. 항우울제라는 것이 다 그런 거더라고요. 40일을 계속하세요. 길이 날 때까지요. 오늘 읽어준 시에서 ‘시방은 아무쪼록 나를 떠나 사람으로 돌아가기. 사람을 떠나 물건으로 돌아가기. 마침내 나를 떠나 나없는 나로 돌아가기.’ 이렇게 되게 뇌에 길이 나도록 40일 이상 꾸준하게 수련을 해야 하는 겁니다. 자꾸 그렇게 보려고 하면 그렇게 보게 됩니다. 근데 나도 요새 가끔 눈이 가려져서 잘 안 보여요. 그게 사람이야. 하긴 그래야 사람으로서 매력이 있어요. 예수님도 그랬을 것 같아요. 후후후.......
생기 :
저는 상대와 절대가 분리되어서 하나가 올라가면 하나가 내려가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상대 안에 절대가 있는 거구나. 그래서 그걸 통하려면 디자이어(desire)를 실현하는 건데, 저에게는 몸은 느끼는데 머리가 막는다는 걸 느껴요. 그래서 디자이어(desire)를 못 찾고, 지난 후에 몸이 말하는 대로 했으면 됐는데 하는 후회를 가질 때가 있었습니다.
머슴 :
많이 갔네. 생기님 많이 갔어요. 이 지점에서는 다급해하지 마시고 몸이 가는대로 가세요. 생각이 막더라도 싸우지 말고 느긋하게 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셔요. 한번만이라도 몸이 가는대로 충실히 가보면 자신감이 붙을 겁니다. 그다음부터는 무척 쉬워요. 생각이 더 이상 어쩌질 못합니다. 자신감을 갖도록 해보세요. 생각이 무기력하게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되면 환희조차 일어납니다. 생각의 본질이 두려움과 의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원적인 두려움이 사라지고 추호의 의심도 사라지는 청정한 새로운 세계를 구경하는 거지요. 원래 거기 있는 거였지만요. 또 두려움과 의심은 없는 사람이 없지요. 그리고 몸이 가는대로 움직여 주는 것이 반드시 거기 있는 두려움과 의심을 잠재우고 원래 있는 니르바나를 회복시키는 키 중의 하나입니다. 언젠가 내가 얘기했듯이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을 가지고 행동하는 겁니다. 몸이 가는 대로 따르려 하면 두려움이 즉시 고개를 듭니다. 놀래지 마시고 비난하지 마시고 그 자리에서 그냥 움직이십시오. 놀랍게도 그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또 그 일이 일어날 때 다시 두려움이 생긴다 해도 당황하지 마십시오, 수십 년을 습관이 되어있는 ‘두려움 일어남’이 한번에 없어지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계속하십시오, 40일, 40번....... 언젠가는 갑자기 소음이 사라져버리듯이 두려움이 사라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 생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즐거움으로 가십시오, 즐거운 마음으로 몸의 목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두려움을 보고 죄의식을 갖지 않으며 초롱하게 깨어있는 의식으로 행동의 첫발자국을 내딛으십시오, 그때 신뢰가 같이 할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조차도 약이 되는 인생의 소중한 부분을 귀중하게 100% 살아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생기님의 삶에서 부정적인 것이 없다는 사실을 넘은 진실을 깨닫고, 그 축복된 사실을 만끽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생기 :
네, 알겠습니다. 최소한 이 지점에선, 일단 저에게 전에는 무심코 알 수 없었던 두려움과 의심이 많다는 사실을 보았고, 얻었습니다. 아멘.
강물 :
처음 왔습니다. 206기 깨기를 했구요. 힐링러브 같은 짧은 수련을 했습니다. 강물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데, 강물처럼 살고 싶어서 이 이름을 씁니다. 쓸수록 더욱 좋아집니다. 여기를 전부터 와봤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기회를 보다가 결국 오늘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느낀 것 두 가지 중에 하나가, 전 제가 이상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상한 사람이 많은 거거나, 제가 이상한 게 아니었거나 하는 겁니다. 위안이 되는군요.
하하하.......
머슴 :
그 얘기를 써보면, 이건 지난주에 고민한 것 중의 하나인데, ‘정상(正常)’ ‘비정상(非正常)’....... 기준이 뭡니까? 정신박약아는 비정상이고, 우리는 정상이야?
자연 :
우리도 정신박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물 :
정신박약아 입장에선 우리가 비정상일 수 있습니다.
머슴 :
그렇습니다.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없습니다. 이게 많이 걸려 넘어지는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강물님 말 참 잘했어요. 다 이상하고 다 비정상입니다.
여백 :
박수 한번 칩시다.
짝짝짝.......
자연 :
우리가 비정상이 맞군요. 비정상이란 말에 모두 박수를 치니까요. 호호호.......
하하하.......
강물 :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상대와 절대를 말해주셨는데, 요새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것을 많이 생각하는데요. 사람이건, 사물이건, 자연이건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사랑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말씀 들으면서도 더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머슴 :
더 자연스러워 지겠다는 것도 생각입니다. 우리 본질은 원래 자연스러워요. 그냥 본질을 회복하면 돼요. 초연한 척, 태연한 척도 척이라는 거지. 이것도 어디엔가 묶이는 겁니다. ‘난 자연스러워’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이미 묶이는 것이라는 겁니다. 가슴이, 몸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자연입니다.
강물 :
네, 감기기운이 있어서 정신이 없기는 하지만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머슴 :
잘 오셨습니다. 허허허.......
바그완 :
강물님은 제가 전 회사 다닐 때 저의 팀장님이셨습니다.
머슴 :
오호. 그래요? 바그완이 꼬셔서 하비람을 다녀오셨구먼?
바그완 :
허허허. 네, 제가 푸쉬 많이 했습니다.
오늘 신실함과 다함이라는 말이 다가오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식사기도 할 때도 ‘다하고 살겠습니다.’라고 하는데 뭘 다하는 건지....... 그전 회사 같은 경우는 할일이 주어져 있었는데, 지금 새로 옮긴 곳은 정해진 일이 적고 자신이 일을 만들어 해야 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자기 일을 잘 찾아서 하지 못한다는 것에서 다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일에서 다함을 하며 살겠습니다. 아멘.
물방울 :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또는 약속이 있다거나 하면 사람이 기대를 하잖아요? 아까 에녹 얘기를 들을 때 그가 365일을 하루처럼 살았다고 하시는데, 과연 내가 이 순간 오늘이 다인 것처럼 살았나. 맨날 내일만 기대하며 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고 내가 이 순간을 살아야 하는데 항상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하고 저쪽에 가서 그 다음이 일어날 다음 날만 기다리고 살고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뱃사공이 혼자 산에를 갔어요. 그래서 집에 저 혼자 있는데 얄미운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하하.......
물방울 :
평소에는 나하고 산에 가자고 한번도 안하더니 친구들이 가자고 하니까 어쩜 저렇게 즐거워하면서 갈까하고 얄미웠는데 잠시 후 밖에 비가 내리더라고요. 그래서 아이 잘됐다!
하하하.......
물방울 :
야, 고생 좀 하구....... 마누라한테 한번도 산에 가자, 운동하자 소리 안 하는 사람인데, 아까도 오면서 고생했다는 소리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이 참 고소하다!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멘.
하하하......
또 하나의 기쁨 :
족보가 역사이면서 자아실현을 요구하고 있다고 이해했는데, 그 자아실현에 대해서 요즘 많이 놓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수련도 했고, 알고도 있는데 못하고 있더라고요. 말씀을 들으며 왜 못하고 있나를 계속 궁리해보니 답이 나오더라고요. 저에게는 의심보다는 두려움이었어요. 예전에는 의심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두려움이 더 고개를 들더라고요. 함께 하고 기댄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저에겐 혼자 간다는 것이 너무 두렵습니다. 갈수록 그 두려움이 올라옵니다. 사람, 인생이라는 것이 혼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두려움이 올라오는 겁니다. 30대, 40대에는 그 두려움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어린 작은 아이가 남의 집에 놀러가서 종류가 다른 세 가지 쥬스가 나오는 것을 보고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느끼는 대신 우리 집하고 다르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저는 고맙다고 말을 했습니다. 나도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왜 자꾸 지금은 아이들 앞에서 가난하다는 생각이 들어오는지 두려웠습니다. 자아실현에서 이런 두려움을 따르는 부정적인 실현 쪽으로 가지 말고 긍정적인 실현으로 만들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머슴 :
기쁨님 두려움을 나이가 들수록 더 많아지는 겁니다. 그건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까 가슴에서 하고자 하는 대로 하시라니까요.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하는 수밖에 없어요. 최근에 나 만나고부터는 잘 하시더니 왜 힘들어해요? 좀더 이완하시고 좀더 느긋하게 생각을 풀어놓아 주십시오.
또 하나의 기쁨 :
네, 알겠습니다.
하별 :
절대와 상대 속에서 절대를 너무 찾다보니까, 다리를 다쳐가지고 상대로 이끌어 내려 주시더군요. 상대 속에서 절대를 바라보라고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시는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멘.
기쁨 :
아니 다리를 어쩌다가 다쳤어요? 심해요?
하별 :
아뇨, 심하진 않습니다. 화장실에서 어디에 심하게 부딪친 겁니다.
저런, 저런, 쯧쯧쯧.......
여백 :
뇌공학적인 마음나누기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무한 자유의 삶을 살아가는 감사와 기쁨의 화신 여백입니다! 하하하....... 행복학 강의 테이프를 들어보니까 뇌공학 얘기도 많이 나오고, 엔돌핀 얘기도 나오고, 그래서 야, 참 내 생각하고 똑같다. 농담으로라도 부정적인 얘기는 하지 말아야겠다. 말 한마디가 습관이고 습관이 실력이고 하니까 좋은 얘기, 좋은 생각만 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요.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주로 ‘낳았고, 살았고,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정말 낳는 것이 중요하구나. 그리고 가족세우기에서도 제가 애가 없으면 그 밑으로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제 아내 사랑님이 안 낳으려한다면 딴 데 가서라도 낳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하.......
머슴 :
그럼 아우님 생각이 많이 바뀌었네?
여백 :
아닙니다. 아직 낳아도 좋고 안 낳아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머슴 :
아녜요. 이어져야 됩니다.
지혜 :
저는 성공하는 삶의 예술가 지혜입니다!
하하하....... 짝짝짝.......
지혜 :
나란히 앉아계신 나그네님과 뱃사공님 참 보기 좋으세요. 부부가 오래 살면 닮는다는데 친구도 오래되면 닮는가보다 하고 두 분이 많이 닮았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구요. 절대와 상대 세계 오늘 말씀 정말 감사했고, 제가 저번 주와 이번 주 두 번 왔는데 저번 주보다 이번 주가 훨씬 더 익숙해져서 지금 편안함을 느끼고 있구요. 이렇게 모르는 내용들을 알아가서 기쁘며 깨우침에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도반들이 계셔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제가 음악을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와아....... 짝짝짝.......
민들레 :
지혜님이 옆에 계신데 매우 친한 느낌이 전해져 옵니다. 많이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 우리 아들하고 살아가기를 같이하셔서 내가 애정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까 족보얘기를 하면서 나는 우리 아빠하고 우리 엄마를 참 잘 선택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선택해서 나온 내가 정말 행복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선택 때문에 지금의 내가 이렇게 긍정적이고 무난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너무 감사하다는 말이 막 올라왔어요. 그런데 이 두 분에게 한번도 감사하단 말을 못하고 두 분이 다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는 당연히 그렇게 주는 거고 나는 당연히 그렇게 받기만 하는 걸로 알고 살다가 그 주시는 것이 고마운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지요. 그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못한 대신에 나 자신이 잘 살아가고, 내 아이들한테 내가 이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나서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행복합니다. 아멘.
순둥이 :
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저하고 또 하나의 기쁨님은 수요 성경팀예요. 머슴님이 람스예배와 합치면 어떨까하시는 얘기를 하셨고요. 체력이나 시간이 허락된다면 제가 다니는 교회에 다니며 두 탕을 뛰게끔 하고 싶습니다. 머슴님의 성경공부가 저에게는 정기적으로 맞는 뽕 같아요.
하하하.......
순둥이 :
뽕을 맞으면 기운이 확 나서 일주일을 살아갔는데, 두 달 쉬었더니 매우 그리웠습니다. 저는 학교에 있는데, 진짜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 20년 넘게 하던 장사가 방학을 끝내고 일주일 됐는데 등에 담이 들면서 힘이 드는 거예요. 이제는 전과는 또 다른 선생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옛날에 항상 하던 건데도 괜히 공을 들이게 되서 별것도 아닌 것에 시간을 오래 끌고, 마음이 더 가게 돼서 그런지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 남편에게 할 일, 아이들에게 할 일을 다 버리고 지금 여기 와서 앉아있는데 역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저도 뱃사공님처럼 창세기 이 부분 낳고, 낳고 하는 얘기를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태 성경을 한번도 통독해 보지 못했지요. 여기저기 읽어보라는 데만 읽어봤지요.
머슴 :
통독할 필요는 없어요. 나처럼 전문적으로 업으로 하는 사람이나 통독하는 것이지. 그러나 뭐 한번 정도 통독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지요. 성경의 구조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순동이 :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머슴님의 성경공부의 진한 매력이 가슴에 팍팍 왔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교장 선생님이셨으면서 유교적인 기풍이 강하셔서 제가 결혼할 때도 남편감이 양반의 자손이냐를 따지셨습니다. 제가 동춘 할아버지 은진 송씨의 11대 손입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얘기를 듣고 자라서 너무 족보가 지겨웠었거든요? 그러데 오늘 말씀을 들으며 족보라는 것이 이렇게 뜻이 있고 이해가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느껴지는 것이, 몇 대, 몇 대에 하나님이 가장 꼭 맞는 이름과 상황과 살았던 연도까지를 정해주시는 걸 보았는데, 저에겐 가장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질 때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이 나에게 꼭 맞는 상황이라고 받아들일 때인데 여기도 이런 뜻이 있겠구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 시대에 여기 태어나 어떤 남편을 만나고 어떤 자식을 낳고 이런 것들이 나에게 가장 꼭 맞는 상황이고 이것이 아름다움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도 족보를 쓰고 내 밑에도 뭔가를 남겨줘야 하는 새 역사를 창조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멘
머슴 :
때에 알맞은 것 곱하기 공간(合時 x 空間)이거든요. 여기서 공간을 해결하는 방법은 영생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간 곱하기 공간이 절대로 향합니다.
생기 :
때에 알맞지 않은 게 있나요?
머슴 :
없지.
순둥이 :
내가 힘들 때 내가 알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머슴 :
오늘 김흥호 선생한테 들은 상대와 절대를 극명하게 표현한 얘기를 오늘 마지막으로 해드릴까 합니다. ‘살아서 먹을 것이 없고, 죽어서 갈 곳이 없다.’ 이것이 허무(虛無)입니다. 이게 상대의 세계입니다. ‘살아서 먹을 것이 있고, 죽어서 갈 곳이 있다.’ 이것이 실존(實存)이며 절대의 세계라고 합니다. 근데 잘 생각해보슈. 우리가 사는 상대의 세계도 살아서 먹을 것이 있고, 죽어서 갈 곳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죽으면 죽었다고 안 그러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절대로 다시 돌아가니까요. 상대가 절대와 분리되지 않았으니까. 없다와 있다도 분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광고하시겠습니다.
하늘 :
다음 주 예배를 이끌어주실 분을 정해야겠는데요.
머슴 :
네, 제가 내일 미국으로 가서 두 주간 제가 설교를 못하거든요. 그래서 누가 자진해서 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뱃사공 :
제가 다음 주에 하겠습니다.
오호....... 짝짝짝.......
머슴 :
그 다음주는?
나그네 :
여성동지께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하늘 :
지원자가 없으니, 그럼 또 다음 주에 모여서 결정하도록 하지요.
짝짝짝.......
기쁨 :
떡볶이와 오뎅이 불고 있습니다.
머슴 :
아, 떡볶이와 오뎅이 불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기도 세 번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 완전 충만 일체 은혜 감사, 그리스도 완전 충만 일체 은혜 감사, 그리스도 완전 충만 일체 은혜 감사, 아멘.
빨간 양념에 푹 담긴 떡볶이와 구수한 국물의 오뎅이 홀 중앙 원목 테이블에 가득 차려졌다. 삶은 달걀도 떡볶이 양념과 오뎅 국물에 담겨있었다. 모두들 젓가락을 바삐 놀리며 정성스럽게 시간까지 맞춘 음식을 먹었다. 평소 빵을 먹을 때보다 일찍 접시가 비워지는 것은 매운 떡볶이 맛과 시원한 오뎅 국물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모두 함께 하여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뱃속만 채워지지 않고 모두의 가슴을 채우는 것이 바로 이 축복이 아닐까. 커피와 베지밀로 입 안을 가시고 있을 때 지혜가 자리를 잡고 바이올린을 꺼내들었다. 바로 오늘 지혜가 가져온 음악 선물이 개봉되고 있는 것이었다. 지혜는 복음성가부터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축복으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다시 쏟아지는 은총의 선율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지혜는 미뉴에트도 연주하였다. 지혜의 바이올린 미뉴에트는 봄이 오는 소리였다. 눈앞에 만개한 화사한 봄꽃들이 가득 차고 있었다. 그리고 꽃길을 따라 아이들이 화사한 옷을 입고 춤을 추며 달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맨발이 밟는 들판은 파란 싹이 올라오는 잔디로 온통 덮여있었다.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바이올린에 힘을 불어넣었다. 황홀한 바이올린 연주에 모두들 잡념이 사라지고 안온한 휴식의 일요일 오후를 선물 받고 있었다.
이어서 뱃사공이 기타를 꺼내들고 지혜의 바이올린과의 합주를 시작하자 모두들 그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처음 노래는 <우리에게 향하신>이었다. 그 다음은 <왕이신 나의 하나님>, <아주 먼 옛날>, <예수 사랑해요>, <너에게 주노라>그리고 <소원>이 합창으로 이어졌다. 노래를 하면서 나그네가 초등학교 때 합창부였다는 것과 기쁨이 어려서 지금은 없어진 TBC, 동양방송 합창단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갑자기 사람들이 기타 치는 뱃사공의 솔로를 원했다. 뱃사공은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소원>을 불렀다. 뱃사공의 노래는 좌중을 압도하여 노래가 끝나자 커다란 환호가 터져 나오며 그치질 않았다. 뱃사공은 결혼 전에 물방울의 집에 가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물방울과 그녀의 식구들, 특히 처제 될 사람을 매료시켰다고 한다. 그의 기타연주와 노래는 그의 인상을 좋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물방울과의 결혼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뱃사공은 나그네와 둘이서 김민기의 <친구>를 부르자고 하였다. 모두 박수로 환영하였다. 두 사람은 중학교 다니던 시절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뱃사공이 이 노래의 멋진 기타 반주를 터득하고는 이 어린 두 친구는 이 노래에 심취하여 부르고 또 부른 것이다. 이들이 듀엣으로 노래를 부를 때 그 잔잔하나 호소력이 있는 노래는 많은 사람들의 눈을 감게 하였다. 음유시인의 노래 같은 김민기의 <친구>가 여운을 길게 끌며 끝나자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김민기는 머슴의 큰형과 절친한 사이로서 머슴과는 오랜 친분이 있었다. 머슴은 이 노래 <친구>가 만들어진 배경을 말해주었다.
이 노래 <친구>는 김민기가 경기고 3학년 때 만들어진 노래이다. 그는 경기 중, 고등학교 때 보이스카웃을 열심히 하였는데, 당시 고 3이었던 그는 경기 중, 고 보이스카웃 대장이었다. 그때 삼척 후진 해수욕장에서 잼보리 대회가 열렸는데, 그의 가장 아끼는 2년 후배가 그만 바다에 빠져 익사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민기는 이 후배를 기리면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뭍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아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고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잠시 잊고 지내지만 우리에게는 죽음과 그와 함께 거둘 수 없는 슬픔이 있다. 그 마저도 노래 속에서 아름다움으로 빛날 수 있지만 죽음은 온전히 그 당사자의 것이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절대의 손길의 하나로서 일일이 숭고한 것 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선물로 받은 이 몸에서 생명과 함께 신비하게도 그치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절대의 손길 중에서 가장 매혹적일 수 있는 것이 바로 늙어감과 함께 이 죽음인 것이다. 사람들은 짙은 포도주를 한잔 마신 것처럼 죽음이 상기시키는 불가지에 잠시 사로잡혔다.
사람들의 침묵을 가르며 뱃사공의 기타연주가 흐르기 시작하였다. 고린도 전서의 내용으로 가사를 만든 <사랑>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에 이끌려 모두 입을 모아 합창을 하였다. 아쉬움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혜는 마지막 바이올린 연주를 선물하였고 소중한 3월의 일요일 하나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10. 에필로그
창세기는 50장으로 된 긴 여로이다. 이제 우리는 5장까지 여행하였다. 꼭 10%를 여행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90%의 여정을 남기고 있다. 이제까지의 10% 여행에 몰입하여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면 앞으로 남은 더욱 긴 90%의 여행은 매우 기다려지는 미지의 여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야할 여정에만 멀리 시선을 맞춘 채, 걸어온 여정보다 걸어야 할 남은 여정이 더 길다고 한숨을 쉰다면 걸어온 여정이 슬퍼할 것 같다. 마치 사랑했다고 믿었는데, 헤어진다고 그 사랑을 까맣게 잊으련다는 야속함을 보이는 것 같아 왠지 석연치 않다. 그렇다고 떠나야하는 사랑을 돌이켜 바라보기만 하여 엉거주춤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 말했다. 떠나가는 사랑에게 깊이 감사하고 흔쾌히 작별을 고함으로써 이별을 축복하라고.......
등산을 할 때 산봉우리를 쳐다보며 걷는 이는 곧 발목이 통증을 하소연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한다. 발목은 그에게 저 멀리 있는 산봉우리도 아니고, 지나온 길도 아니고, 지금 여기의 발걸음을 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아주 작은 목소리지만 없는 데가 없으며 있는 곳을 알 수 없는 영혼의 목소리는 항상 우리를 안내하는 말을 걸어온다. 그 말이 들려올 때마다 할 수 있는 일이 단 한 가지 있다. 그 신비한 안내를 따라 가장 가까운 질문에 나를 데리고 오는 것이다. 지금 여기는?.......
여행을 시작한 자는 항상 여행 중이다. 그대가 태어나서 삶의 여행이 시작되고 지금도 여행 중인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만이 여행의 유일한 목적이며 그 여행 자체일수는 없다. 물론 마지막 기착지를 터치하는 일은 하나의 경축할 만한 아름다움이다. 만약 그대가 그 순간 거기에서 터치하는 손끝 발끝에 전체를 담아 존재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 기착지에 도달하기 전에 있는 여행의 매순간에서 그런 터치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터치하는 방법과 똑같다.
여행 중에는 그대가 미처 다 기억을 못하는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
무심코 눈길이 간 길 가에 핀 소박한 꽃 한 송이나 풀잎과, 그대를 사로잡은 그들의 가느다란 생명을 담은 한줄기 향기.
문득 눈앞에 펼쳐지는 푸른 하늘로 고개를 들어 누구를 닮은 뭉게구름이 곧 흩어져 이별을 쉼 없이 노래하는 살아있음에 사로잡혀 잠시 망연해졌던 그대의 눈망울.
짧은 눈 맞춤을 등을 돌려 덮으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간 사람들의 알 수 없는 뒷모습들.
많은 이야기들이 피어오른 이름 모를 산골짜기와 길모퉁이.
의문이 펼쳐지는 길바닥을 향해 떨군 그대의 머리를 간질이던 바람의 끊임없는 미지로의 초대.
항상 목적지까지 유예하는 그대 현존의 고독.
그대의 발바닥이 땅에 닿는 소리, 소리, 소리.......
오래전부터 그대를 불러왔던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에게 너무도 늦게나마 인사를 건넬 수 있었던 작은 경탄의 자유 찾기.
그리고 여정의 어디에선가 잠시 쉬어가는 달콤한 쉼들....... 그리고 그대!
이들 모두 여행에서 얻는 하나의 소득일 수 있으며 여행 전체와 맞바꿀 수도 있는 결코 작지 않은 귀중한 것들이었다. 만약 그대가 그 순간을 진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사랑에 빠진 이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하늘이 열리고 모든 것이 시작된 창세기가 지금 이 순간 그대 안에서 끊임없이 시작되고 있다면, 그대가 항상 시작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세상을 창조하고 있는 그대가 문득 깨어나 자신이 짓고 있는 세상을 보며 창조로서 존재하는 자신의 현존을 축복할 수 있는 것은 시작 속에 그 끝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창세기 여행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함께 많은 비밀들을 발굴해 내었다. 더 많은 발굴되지 않은 비밀이 앞으로 우리가 눈앞에 두고 있는 90%의 여정의 곳곳에 있을 것이다. 그대여, 이 수 많은 비밀의 보물들을 수집하여 부자가 되고 싶은가?....... 그러나 그대여, 나그네로 남으라. 그대가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의 비밀들을 수집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것들을 순간순간 그대를 변화케 하는 이정표로 삼을 때 그 비밀과 그대는 모두 자유롭다. 그대의 자유는 그대만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대의 비밀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그대의 비밀과 맞닿아 있는 이 세상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대, 알겠는가? 창세기의 비밀은, 나아가서 성경 전체의 비밀은 태초부터 그대와 다름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그대 자신의 비밀이었다. 그래서 완전한 자유를 얻으려면 창세기 속의, 성경 속의 그대의 비밀도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야 펼쳐지는 세상의 진실한 모습이 그대에게서 살아나야 한다. 그렇게 하여 그대의 삶은 또 한번 도약을 하는 것이다. 그저 그 비밀들이 그대의 존재방식임을 받아들여 숨을 쉬고 춤을 추게 허용하라. 행여 그 비밀들을 교회나 성직자에게 빼앗기지 마라. 그것들은 교리화와 같은 구속에 의하여 모욕당할 것이 절대 아니다.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이미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밖에 있을 수 없다. 이미 그대가 그이기에 비밀이 그대를 향해 밝혀지고 있는 것이며 그 밝혀지는 비밀은 그대가 바로 하나님이며 그리스도임을 경축하는 노래일 뿐이다. 그래서 이 노래는 그대 안으로부터만 피어오르고 있다. 누군가 이 노래를 판다고 헌금을 요구하며 사라고 하거든 경계하라. 그는 사기꾼임에 틀림없다. 명심하라. 이미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밖에서 구하려고 할 때 그대는 실패할 것이다.
그대, 나그네로 남으라. 죽은 것들을 수집하여 잔뜩 끌어안아 가슴을 무겁게 만드는 짐일랑 놓아버려라. 차라리 매순간 솟구치어 등장하는 삶의 살아있는 모든 것을 언제나 반기어 안아 품어 사랑할 수 있는 항상 활짝 열린 가슴을 가진, 삶을 여행하는 나그네로 남으라. 그대 안에 이 여행이 존재하며 여행 자체가 그대인 것이다. 그래서 기어코 그대 자신을 깊숙이 안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의 것을 자신답게 하는 것이고, 자신이 진정 자신이 되어 자신의 것을 잃지 않는 유일한 길이며, 자신이 전체이며 대자유가 아닐 수 없음을 깨닫는 길이다.
선물은 그를 준 자 앞에서 열어보고 즐기는 것이다. 그것을 아껴 개봉도 하지 않고 깊은 금고에 넣어둔 채 ‘나는 선물을 받았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대, 그대의 생명과 생명의 긴 여로인 삶이라는 여행은 그대에게 주어진 선물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대, 생명을 불꽃처럼 살러 즐기라. 그리하여 그대의 그리스도성이 활짝 깨어나 이 아름다운 여로의 삶을 살아가게 하라.
그대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경배드립니다. 아멘.